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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무서움

중앙선데이 2014.06.08 02:43 378호 31면 지면보기
중요한 누군가(somebody)가 된다는 것. 사람들이 소위 이 ‘누군가’가 되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필자는 왜 그렇게 유명해지고 싶은지, 왜 그처럼 힘이나 명예를 갖고 싶은지 이해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강의실이나 식당에서 구석진 어두운 곳처럼,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는 곳에서 다른 이를 바라보거나 구경하는 게 좋았다. 스포트라이트보다 그림자를 선호하는 게 나뿐만은 아닐 게다.

약 한 달 전, 연세대 송도 캠퍼스 학생을 상대로 ‘글 쓰는 삶, 꿈꾸는 삶’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학생들은 대부분 1학년이었다. 지적이고 성실한 학생들은 유명인이 된다는 것을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이며 자신들도 유명인이 되고 싶어 했다. 유명인의 의미를 묻자 많은 학생이 “타인이 주목하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요지로 답했다.

그 학생들에게 시를 하나 소개했다. 19세기 미국 작가 에밀리 디킨슨의 ‘난 아무도 아니야. 넌 누구니’였다. 디킨슨은 이 시에서 유명한 누군가가 되는 것이 ‘얼마나 따분한지’ 마치 습지에서 하루 종일 울어대는 개구리와 같다고 적었다. 그의 작품은 자신의 의견에 애정을 갖고 자신의 힘에 안도하며 남 위에 군림하려는 이들을 조롱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의미가 크다.

디킨슨이 설파했듯 권력이란 그것을 행사하는 이들을 변화시킨다. ‘행사(exert)’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력을 행사한다는 행위의 위험은 우리 주위에 늘 도사리고 있다. 직장 상사부터 정치인, 문화인, 교사, 가정의 가장, 국가 등.

에드워드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제3세계를 형편없는 골칫거리이자 문화적·정치적으로 열등한 곳으로 치부하는 서구의 공통된 인식”이 있다고 분석했다. 수백 년간 이런 인식은 서구 열강들에 다른 나라와 그 국민을 무시하도록 만들었다.

개인적인 것은 곧 정치적인 것이다. 열강이 다른 나라를 침묵시키는 것과 상사가 부하 직원을 침묵시키는 것, 부모가 아이의 입을 막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미국 소설가 토니 모리슨의 1993년 노벨 문학상 수상소감은 아직도 도덕적 우화처럼 회자된다. 모리슨은 천리안을 가졌지만 눈이 먼 노파를 등장시키고, 이 노파는 한 무리의 젊은이를 만난다. 이 젊은이들은 손 안의 새를 노파에게 주며 그 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묻는다. 키득거리는 젊은이들에게 노파는 답한다. “그 새의 생사 여부를 나는 모르지만 나는 그 새가 너희들 손에 있는 건 안단다. 그건 너희들 손에 있어.” 모리슨은 곧 그 새의 운명이 결국 그 새를 손에 넣은 이들의 책임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건 권력의 과시가 아니라 그 권력이 수반하는 책임과 영향력이다. 권력을 가진 이는 어떤 것을 더 좋게 혹은 더 나쁘게 바꿀 수 있다.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이고, 누구를 위해 더 좋은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가 문제다.

권력 남용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은 누군가가 그 권력을 갖고 다른 이의 목숨을 구해 줄 수 있는 경우가 생긴다. 나 역시 탈북자를 돕는 일을 했던 적이 있고, 그때 만났던 북한정의연대 베드로 정 목사를 잊지 못한다. 그는 현장에서 “어떤 상황에서건 식량과 안전이 우선이다. 선교는 나중”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와 같은 여러 활동가는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해 가면서 탈북자들의 안전을 최우선에 놓았다.

모리슨의 연설에 등장하는 새처럼 권력이란 유약한 생물이다. 권력은 쉽게 부패한다. 세월호 참사에서뿐 아니라 한국 및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권력 남용에서 우린 부패한 권력을 쉽게 목도한다. 권력의 달콤함에 빠진 이들에게 법정 스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다.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 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크리스 리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 2012년 소설 『떠도는 집(Drifting House)』으로 데뷔했다. 연세대 언더우드 국제대학(UIC)에서 문학창작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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