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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4D로 전쟁 체험 … 작년 200만 인파

중앙일보 2014.06.07 02:11 종합 10면 지면보기
5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찾은 가족. 유엔군 전사자 명비 앞에 태국 관람객이 헌화한 조화가 놓여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 1993년 초 어느 날 검은색 양복을 입은 청와대 직원이 이성관 한울건축 대표를 찾아왔다. 이 대표는 이듬해 개관을 앞둔 전쟁기념관 설계를 맡고 있었다.

용산 전쟁기념관 개관 20주년



 “전쟁기념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쓰면 어떨까요.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기에 시대가 적절치 않습니다.”



 사실상 전쟁기념관 건립을 백지화하자는 제안이었다. 이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박물관으로 지으려 했다면 이렇게 설계하지 않았습니다. 평시에도 전쟁의 아픔을 알리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전쟁기념관을 짓기로 한 건 1988년 노태우 정부였다. 하지만 91년 소련이 해체되고 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쟁기념관 건립에 부정적 여론이 팽배했다. 전쟁 유물은 경기도 성남 남한산성 인근으로 옮기고 전쟁기념관을 국립박물관으로 바꾸자는 대안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2. 지난 5일 전쟁기념관은 관람객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자녀 셋과 함께 전북 전주에서 올라왔다는 이성혜(39)씨는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처참한 전쟁의 잔해들을 보며 전쟁이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전투 장면을 재현한 4D 영상관. 포탄이 터지는 장면에서는 의자가 흔들리고, 차가운 눈발이 흩날리는 장면에서는 실제로 인공 눈발이 얼굴을 때렸다. 1·4 후퇴 전시관을 지날 때는 발 밑에서 얼음이 깨지는 영상이 나타나 관람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터치스크린을 누르면 스탈린과 김일성의 1949년 회의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녀와 함께 이곳을 찾은 최연희(41·경기도 용인시)씨는 “52년 북한군에게 끌려간 큰아버지의 생사를 아직도 모릅니다. 이곳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아이들에게 알릴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라고 말했다.



 전쟁기념관이 10일 개관 20주년을 맞는다.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다. 특별기획전 ‘청일·러일 전쟁의 위기에 선 대한제국’ 등 대한제국에 관한 특별기획전이 5개월가량 이어질 예정이다. 추억의 사진 공모전도 열고 전쟁기념관 역사실도 신설한다. 하반기에는 3000여㎡ 규모의 어린이 전용 전쟁박물관을 개관한다. 조용하게 치러졌던 10주년 기념행사와는 사뭇 다르다.



① 제2연평해전 당시 침몰한 참수리 357정의 복제함정. ② 거북선 모형. ③ 6·25전쟁실 곡사포 모형.④ 4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미국군 전사자 명비에 헌화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중앙포토]
 전쟁기념관이 있는 곳은 원래 육군본부 자리였다. 서쪽으로 이태원과 동쪽으로 용산역을 사이에 둔 서울의 금싸라기 땅이었다. 88년 육군본부가 대전 계룡대로 이전하면서 생긴 빈 땅에 노태우 정부가 전쟁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전쟁을 굳이 기념해야 하느냐’ ‘왜 하필 도심지냐’는 논란이 계속됐다. 그때 한국전쟁에서 대대장으로 참전했던 고(故) 이병형 초대 전쟁기념관장이 배수진을 쳤다.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 그러다간 한국전쟁이 남침이었나 북침이었나를 두고 논쟁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전쟁기념관은 꼭 필요하다”고 맞섰다. 기념관은 예정대로 94년 6월 10일 문을 열었다. 설계자 이성관 대표는 “문민정부 시대 ‘문’을 강조하다 보니 당시 전쟁기념관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생아 취급을 받았다. 자유는 공짜로 얻어질 수 없다(Freedom is not free)는 점을 모두 잊은 듯했다”고 회상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1998~2008년)를 거치면서도 전쟁기념관은 빛을 보지 못했다. 97~98년 외환위기로 입장객 수가 줄어 기념관 수입이 감소하자 국방부와 문화체육부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전쟁기념관은 입장료 수입의 5%를 문화부 문예진흥기금으로 내야 했는데 국방부가 돈을 내지 않겠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전시해 놨던 총기를 도둑맞기도 했다. 한 달 뒤 이 총을 들고 은행을 털려던 도둑이 붙잡히면서 전쟁기념관의 허술한 관리 실태가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사건이 이어졌던 2010년 이명박 정부는 361억원의 리모델링 예산 지원을 결정했다. 이 돈으로 재개관에 맞먹는 변화를 시도했다. 미국·호주·일본 등 각국의 전쟁기념관을 둘러보고 앞선 전시 기법을 도입했다. 한국전쟁 참전국들도 힘을 보탰다. 룩셈부르크는 자국 군대가 참전했던 53년 4월 강원도 잣골 전투를 재현하는 모형 제작에 참여했다. 1인당 1000~3000원씩 받던 입장료도 없앴다.



 94년 개관 이후 줄곧 한 해에 60만~70만 명 정도였던 관람객 수는 2010년을 기점으로 크게 늘었다. 지난해에는 최초로 200만 명을 넘어섰다. 안내 봉사를 하고 있는 전직 교장 조석봉(63) 해설사는 “3년 전까지 하루 2~3개 학교에 불과했던 단체 관람이 최근에는 5~7개 학교로 늘었다”고 말했다. 외국인 안내 담당 김삼곤(68) 해설사는 “북한의 도발 소식이 들리면 외국인 방문이 주춤해지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지난 4월엔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다. 그는 관람 내내 “거북선이 몇 년 도에 제작된 거냐” “이곳에 매년 관람객이 얼마나 되느냐”는 등의 질문을 이어갔다. 계획된 관람 코스를 벗어나 삼국시대 전쟁 유물 전시관으로 쑥 들어가는 바람에 경호원이 당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난 5일 전쟁기념관 3층 기증실. 중앙에 전시된 콩알만 한 쇳덩이를 한 중년 신사가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쇳덩이 밑에는 파편이 박힌 두개골 X선 사진이 놓여 있었다. “제 아버지의 머리뼈 속을 53년 동안 짓누르던 포탄 조각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어요.” 그는 선친의 유품이 20주년을 맞아 새로 꾸며진 전쟁기념관에 안치됐다는 소식에 이곳을 찾은 이병기(53)씨였다. 포탄 조각은 선친을 2005년 화장했을 때 발견됐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친의 이야기를 전하던 이씨는 어느새 62년 전 포탄이 터지는 한국전쟁 한복판에 서 있는 듯했다. 기증실을 나온 이씨는 전쟁기념관 직원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거듭 “고맙다”고 했다. 그의 얼굴에는 회한과 안도의 표정이 겹쳐져 있었다.



글=김민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미군 기증 B52, 48조각 나눠 애틀랜타 → 서울 수송



서울 이태원을 빠져나와 삼각지로 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폭격기가 시선을 붙잡는다. 이곳이 전쟁기념관임을 짐작하게 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핵무기를 싣고 장거리 비행할 수 있어 ‘하늘의 요새’라 불렸던 폭격기 B52다. 길이 48m, 무게 221t.



 1990년 한국이 전쟁기념관을 개관한다는 소식에 미 공군은 걸프전에 사용했던 퇴역 폭격기 B52(사진)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전쟁기념관 측은 운송업체에 3억원을 주고 미국 애틀랜타에서 서울 용산까지 이 폭격기를 옮겨오기로 결정했다. 폭격기를 48등분으로 쪼개 배에 싣고 6개월만인 92년 6월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옮길땐 고속도로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해 국도로 이동했다. 서울 시내에선 거대한 폭격기가 전봇대의 전깃줄을 끊어버리지 않도록 한국전력이 나서야 했다. 폭격기가 이동하는 길에 설치된 전깃줄들을 치워놓았다가 폭격기가 지나가면 다시 잇는 소동을 벌였다.



 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3만여 점. B52처럼 중장비가 많아 전시에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많았다. 유물 중 40%는 시민 기증품으로 채워졌다. ‘살아 돌아오라’는 글귀가 적힌 태극기, 전쟁 중 병상에서 쓴 일기장 등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물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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