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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 위패 3260위 모셔 … 40년째 매일 새벽 5시 예불

중앙일보 2014.06.07 02:06 종합 11면 지면보기
올해 여든하나인 박태승 회장은 여전히 기개가 넘쳤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는 맥아더의 말이 절로 떠올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어제는 현충일이었다. 6·25 64주년도 곧 다가온다. 6월 호국보훈의 달,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되돌아보는 시기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먼저 간 전우들 생각에 가슴이 아리는 이가 한둘이 아닐 터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사는 박태승(81)씨의 사연도 남다르다.

[박정호의 사람 풍경] 6·25참전 소년병전우회장 박태승씨



 지난달 27일 풍기읍 기주로 107번길 10. ‘심우원(尋牛苑)’ 간판이 눈에 띈다. 풍기불교법우회 건물이다. ‘소를 찾아서’라는 뜻의 ‘심우’는 불자(佛者)의 구도 과정을 말한다. 박씨는 이곳 지도법사로 있다. 40평 크기의 법당에 들어갔다. 불단(佛壇) 왼쪽에 태극기가, 그 아래에 ‘참전순국소년병 영가(參戰殉國少年兵 靈駕) 3260위’ 위패(位牌)가 보인다. 한국전쟁 때 순국한 소년병을 기리는 위패다. 6·25 참전소년병전우회장을 맡고 있는 박씨는 1974년부터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저세상의 소년병을 위해 예불을 올려왔다.



6·25 참전 순국 소년병 3260명의 명부.
 - 벌써 40년째,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면 됩니다. ‘천수경(千手經)’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봉독하고, 부처님께 소원을 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1만 번 염불합니다. 1시간30분쯤 걸립니다.”



 - 계속 이 자리에 계셨나요.



 “아닙니다. 5년 전에 법당을 마련했습니다. 그전에는 제 집 뒤채에 모셨죠. 셋방살이도 했고요. 호국영령을 모시는 데 죄스럽기만 했습니다. 법당 짓는 데만 20년이 걸렸습니다.”



 소년병 3260명의 명부도 놓여있다. 성명, 군번과 계급, 입대일과 전사일이 정리돼 있다. 2011년 국방부가 집계한 2573명과 그 명단에서 누락된-박씨가 개인적으로 확인한- 병사 687명을 더한 수치다.



 박씨도 소년병 출신이다. 군번 0350115. 50년 8월 열일곱 나이에 입대해 55년 2월 하사로 만기 제대했다. 경북 경산이 고향인 그는 낙동강 전투를 시작으로 서울 수복, 38선 돌파, 평양 입성을 거쳐 평북 박천까지 올라갔으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남하해야 했다. 총성이 멎은 뒤에도 부족한 병력 탓에 만 5년 가까이 복무해야 했다. 그보다 네 살 많은 형 태창씨는 51년 2월 강원도 소양강지구에서 전사하는 아픔도 겪었다.



 - 가족사가 비극적입니다.



 “두 아들을 전장에 내보낸 부모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입대 당시 중학 2학년이었습니다. 제대 직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부모님을 봉양해야 했어요. 죽은 형을 가슴에 묻고 사는 부모님의 고통을 지켜봤습니다. 이제 여든이 넘었지만 부모님 얘기만 나오면 항상 ‘얼라’로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 마음고생, 몸 고생이 크셨겠어요.



 “제대 후 돌아와보니 형수님이 노부모님을 모시고 계셨어요. ‘시동생 씨를 받아 대를 잇겠다’고 하시더군요. 눈물 속에 형수님을 밀쳐냈습니다. 막노동·품팔이,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세상 원망도 많이 했고요. 그러다 40여 년 전 불교와 만났습니다.”



 - 힘겨웠던 세상과 화해한 건가요.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셨던 강석주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왜 나만 힘들게 살까 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서주(西舟)’라는 법명을 지어주셨죠. 서쪽(극락)으로 가는 배. 스승님 말씀을 듣고 전쟁에서 죽은 동료들을 정토(淨土)로 안내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하자는 거였죠.”



 - 결정적 계기는 없었나요.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열다섯 살 전우가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가 ‘더는 갈 수 없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름도 몰랐던 아이였습니다.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평생을 속죄하는 심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 개인 혼자 짊어질 문제는 아닌데요.



 “동병상련에서입니다. 병역의무가 없는 만 18세 미만 소년·소녀 3만여 명이 참전했습니다. 3000명 넘게 전사했고요.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지만 끌려간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들 어려운 집 아이들입니다. 소위 돈 있고 힘 있는 집 자식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고관대작의 아들이었다면 이 일을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박씨는 이후 소년병의 명예회복에 뛰어들었다. 96년 소년병전우회중앙회를 조직하며 잊혀졌던 소년병의 복권에 전념해왔다. 98년부터 매해 6월 합동위령제를 열고 있다. 올해에도 오는 20일 대구 앞산공원 승전기념관에서 행사가 진행된다.



 - 소년병 생존자는 얼마나 되나요.



 “6000~7000명으로 추정됩니다. 전우회 회원은 950명가량입니다. 1년에 5만원, 회비를 꾸준히 내는 사람은 300명이 채 안 됩니다.”



 -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나요.



 “나라가 인정한 공법단체가 아니라 회비로만 꾸려갑니다. 소년병의 존재가 알려진 것도 그나마 최근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50년 가까이 흐른 2001년 5월에야 가족·친척이 없는 소년병 전사자 870명의 위패를 서울현충원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간 포상은 둘째치고 국가 차원의 사과나 위로가 전무했습니다.”



 -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소년병들은 현충일이 돌아와도 이름 석 자 불러줄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전국에 현충 시설이 300여 기나 있지만 정규군으로 순국한 소년병을 추모하는 돌멩이 하나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화랑 관창이요, 유관순 열사인데 말입니다.”



 - 이유가 뭐라고 보시나요.



 “국방부는 징병을 적법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6·25 당시 법령 어디를 찾아봐도 18세 미만 민간인을 징집할 근거는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국난의 시기, 우리의 아픈 역사에 트집을 잡자는 뜻이 아닙니다. 최소한 그들의 공적을 인정하고 정당한 보상을 해줬으면 합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소년병들의 순국정신은 후세에 본보기로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씨의 한평생은 6·25를 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집 전화, 사무실 전화, 휴대전화 뒷자리 번호에 ‘0625’ 넉 자를 빠뜨리지 않을 정도다. 소년병 이외에도 6·25 최대 격전지였던 다부동 전투 무연고 전사자 741명을 찾아 2001년 국립대전현충원에 봉안했다. 2003년 국회 국방위 박세환(현재 재향군인회장) 의원의 도움을 받아 6·25 전사자 3만6024명의 위패를 대전현충원에 모시는 데도 일조했다.



 “2008년 정부에 ‘소년병의 실체를 인정하라’는 탄원서를 냈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 과제로 선정되기도, 국회 공청회가 열리기도 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2005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소년병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법안을 의결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현충일을 쓸쓸하게 맞이해야 할까요. 답답하고 갑갑합니다. 소년병들의 희생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됐는데 말입니다.”



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1952년 12월 미8군 제45보병사단 사령부 파견 시절의 박태승(오른쪽)씨.
◆소년병과 학도병=비슷해 보이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6·25 당시 학생 신분으로 참전했다는 공통분모가 있으나 정규군(소년병)과 의용군(학도병)이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소년병은 군번이 있으나 학도병은 군번이 없다.



 영화 ‘포화 속으로’(2010)에 등장하는 학도병은 학도의용군의 준말이다. 대부분 자원 입대했다, 1950년 6월 29일 이후 육·해·공군 또는 유엔군에 예속돼 나라를 지켰다. 중공군이 참전하며 전황이 복잡해지자 정부는 51년 2월 학생들의 학교 복귀를 명령하고, 결국 학도병도 공식 해산된다.



 소년병은 그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연령·징집 내용 등에서 학도병과 확연히 다르지만 지금까지 주로 학도병에 포함돼 이해돼 왔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학교에 돌아가지 못한 채 장기 복무한 경우가 많았다. 2011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 소년병 연구』에 ‘잊혀진 전사’로 명명됐다.





군인의 사표, 안중근과 이종찬



안중근(左), 이종찬(右)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박태승씨의 심우원 법당 사무실에는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유묵(遺墨) 사본이 걸려 있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이다. 안 의사가 1910년 3월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그를 경호했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 준 글이다.



 박씨는 안 의사를 군인정신의 사표(師表)로 모셔 왔다. “그 어른의 정신은 대한민국 사람이 다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안 의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하셨던 초인간이었습니다. 군에 관한 일을 하다 보니 저 스스로를 다짐하는 경구로 삼았습니다.”



 박씨가 잊지 못하는 또 한 명의 군인이 있다. 6·25 때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이종찬(1916∼83) 장군이다. 이 장군은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계엄령에 반대하고 60년 3·15 부정선거에 동조했던 군인들을 숙정하는 등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데 노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박씨는 51년 겨울 미군 인사과 근무 당시 대구 육군본부에서 이 장군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지능이 약간 모자라 보이는 카투사 한 명이 탈영 혐의로 헌병대에 잡혀 왔는데, 알고 보니 이 장군의 사촌동생이었던 것. 박씨는 고심 끝에 인사과장과 함께 이 장군을 찾아가 카투사 병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물었다.



 “장군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즉시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명령했어요.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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