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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 프랭클린 대의 비극

중앙일보 1978.08.12 00:00 종합 4면 지면보기
탐험가로 명성 높은 영국의 해군제독 「존·프랭클린」경이 북극항로 탐험과 북미지역 지도작성의 대임을 띠고 1845년5월25일 항해에 나섰다.

남극탐험에서 이름이 나있는 3백t급의 탐험선 「에러버스」·「테러」 등 두 배에 「베테랑」급 선원 1백29명과 그들이 3년간 쓸 수 있는 식량과 연료 등을 싣고 떠났다.

배 난파로 2년간 버티다 전멸|조난여부 수색하다 북극항로를 뚫어

<백29명, 3년 분 식량휴대>

당시 「프랭클린」은 59세. 젊어서 두 차례 「캐나다」북부를 탐험한 공로로 경이 됐고, 출항직전엔 태평양 「크리스머스」도의 총독으로 있었다.

「프랭클린」의 북극 탐험대는 출항 2개월 후인 그해 7월말 「바핀」도 북방 「랭카스터」해협해서 고래잡이배에 목격된 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3년분의 보급품을 실었기 때문에 당초엔 별로 걱정하지 않았지만 3년이 지난 1848년 후반에 들어「런던」은 물론 영국사회 전체에 불안이 일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술집이나 사교「파티」에서도 그들의 행방에 관한 「루머」와 추측이 화제의 주제가 됐다.

「프랭클린」의 부인 「제인」여사의 끈질긴 구조요청에 따라 정부는 「프랭클린」대의 수색에 공헌한 자에 대해서는 국적과 인종을 불문하고 2만「파운드」의 상금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해군과 개인·단체 및 상사들도 수색에 나섰다.

그후 「유럽」과 미국에서 40개의 수색대가 동원되어 14년만에 대강이 밝혀졌다.

「비치」도에 상륙, 벌판과 골짜기를 샅샅이 뒤진 미국 해군중위 「헤이븐」수색대는 창고터와 묘지를 발견했다.

창고터엔 빈 깡통과 「로프」·빈병이 널려 있었다. 이곳은 「프랭클린」대 마지막 숙영지로 간주되고 있다.

창고 주변에 있던 3개의 묘는 조사결과 「테러」호의 「트런튼」기관장과 「에레버스」선원 두 명의 장지로 밝혀졌다.

1854년 「허드슨」만 개발회사가 파견한 「존·래」박사 「팀」은 「캐나다」최북단 「페리」만에서 「에스키모」들로부터 중대한 단서를 얻었다. 4년 전 봄 「킹·윌리엄」도에서 백인 40여명이 얼음 위에서 「보트」와 썰매를 끌고 남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 그들은 사슴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간다면서 「에스키모」들로부터 약간의 해표고기를 샀다고 전했다. 「에스키모」들은 그해 가을엔 30구의 백인 시체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래」박사는 「에스키모」들이 시계와 망원경, 그리고 「프랭클린」가의 문장이 들어있는 식기와 숟가락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 이를 몇점 사가지고 귀국했다.

<탐험선, 빙산과 충돌>

「래」박사는 「프랭클린」에 관한 최초의 소식 전달자로 인정되어 정부로부터 1만「파운드」를 받았다.

그러나 확실한 소식은 「프랭클린」의 부인이 개인자금으로 파견한 「매클린토크」대에 의해 밝혀졌다.

이들은 「킹·윌리엄」도에 상륙, 사냥중인 「에스키모」들로부터 수년 전 백인의 배가 빙산과 충돌하여 「윌리엄」도 북안에서 침몰했다는 말을 들었다.

내륙으로 수색행진을 계속해보니 해골과 옷조각이 빙판에 얼어붙어 있었고 눈 속에서는 양피지의 영국 선원수첩 2개와 편지 3통이 나왔다. 그 주변에는 「프랭클린」대의 「보트」·책·회중시계·총 등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한 통의 신문이었다. 선임장교인 「크로지어」대령과 「에레버스」호 선장 「제임즈」대령이 서명한 이 글엔 『1848년4월25일, 폐하의 배「테러」호와「에레버스」호는 4월22일 포기됐다. 두척의 배는 1846년9월12일 이래 얼음에 갇혀 버렸다. 1백5명의 장교와 사병들은 「크로지어」대령 지휘아래 이곳에 상륙했다. 「존·프랭클린」은 1847년6월11일 사망했다. 탐험대는 지금까지 장교 9명과 사병 15명을 잃었다. 내일은「백스피시」강을 향해 출발한다.』

탐험대는 첫 겨울을 「비치」섬에서 보내고 그후 2년간을 여기서 보낸 후 식량이 떨어지자 먹이를 찾아 뿔뿔이 헤어져 눈 위를 헤매다 하나씩 죽어 결국은 전멸하고 말았다.

<빙판에 널린 해골·옷조각>

그러나 「프랭클린」은 어떻게 죽었는지, 그들은 왜 「에스키모」의 도움을 얻으려 하지 않았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프랭클린」대의 참사는 탐험사상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돼 있다. 「햄리트」형의 「프랭클린」은 중위 때도 「허드슨」만 연안과 그 주변 불모지의 지도를 작성하라는 해군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극지에 파견됐다가 조난, 피로와 굶주림과 추위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당시 그는 사냥하던 「에스키모」들이 버리고 간 동물 뼈를 끓여 18일간을 버티고 구조되기 직전에는 구두가죽과 혁대를 씹어먹으며 연명했다.

그의 초기탐험 수기는 당시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극점을 처음 정복한 「아문젠」도 그것을 읽고 탐험가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고백했다.

「프랭클린」의 북극 개척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미지의 북극은 「베일」이 벗겨졌다.

그 결과 1879년 「누르덴시윌트」에 의해서 동북 항로가, 1906년 「아문젠」에 의해서 서북항로가 완전히 주파되어 대서양에서 북극해와 「베링」해협을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북극항로가 완전히 뚫렸다. 【구종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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