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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의 시시각각] '고담시' 에서 안전시장 뽑기

중앙일보 2014.06.03 00:35 종합 30면 지면보기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고담(Gotham)시. 성경 속 고모라의 ‘고’, 소돔의 ‘돔’을 합한 도시다.



 음산한 검은 구름에 ‘쩔은’ 불안전 도시의 대명사인 이곳에서 시장을 뽑는다면…. 적어도 고담시민들은 악당 ‘조커’가 되는 끔찍한 일만은 막아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출발을 생각하면서 부질없는 공상을 해봤다. 고대 아테네 민회. 투표 때 도자기 조각에 사람을 적었다. 6000표 이상을 얻은 사람, 시장에 뽑히는 게 아니라 10년 이상 아테네를 떠나야 했다. 도자기 조각에 적은 건 독재를 할 위험이 있 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ostracism)다.



 2500년이 더 지났지만 투표란 게 그렇다. 누굴 뽑는 게 아니라 누굴 떨어뜨리는 것. 그런 심판의 요소가 분명히 있다. 다만 누구를 응징해야 할지 시야를 흐리게 하고, 투표 욕구를 감퇴시키는 일이 있어 문제다.



 #1. “이러니 지방이 되겠어?”



 지난 2월 10일 만난 수도권 A시장이 넋두리하듯 말했다. 지방에 ‘자치’가 없다면서다. 정말 자치가 필요한 분야로 A시장은 ▶치안 ▶안전 ▶교육 ▶복지를 꼽았다. 그런데 모두 중앙정부에 예속돼 있다고 한탄했다.



 “지방은 ‘악마세금’이나 걷고….”



 그가 말한 ‘악마세’는 담뱃세였다. 그마저 금연캠페인 때문에 매년 줄고 있다고 한다. 돈은 줄고, 권한은 없는데 무슨 수로 자치를… .



 “이런 상황에서 왜 ‘새정치’가 들이미느냐고, ‘새행정’도 아니고.”



 A시장은 야당 소속이다. 그의 말대로 공허한 새정치 논란으로 ‘자치 없는 지방자치’의 역설은 공론화되지 않았다.



 #2.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한 지인이 1일 화가 나서 전화를 했다. 여당 중진 의원들이 ‘도와주세요’라고 적은 피켓을 들고 시위 비슷한 1인 유세에 나선 걸 보고서다.



 “아니, 여당이 급하다고 피켓 들고 나가면, 야당이 피켓 드는 것도 못마땅한 사람들은 어쩌라는 거야, 정말.”



  보수인사들이 1인 피켓 시위를 하는 건 좀 코믹하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야. 저런다고 표가 와?”



 지방 없는 지방선거에 각종 ‘가족사’도 등장했다. 고승덕 서울교육감 후보자의 딸 캔디 고가 “아버지는 자식들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고 인터넷에 올린 폭로 글이 일파만파다.



 예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장인이 6·25전쟁 중 부역한 사실이 도마에 오르자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는 한마디로 논란을 잠재운 적이 있다.



 가족 문제에 있어서 ‘연가(戀歌)’만 한 대응수단이 없다. 하지만 이번은 확산 속도가 다르 다. 혹 정치혐오감을 깊게 할까 걱정이다.



 #3. 상황이 이러니 “도대체 투표 왜 해야 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 더 못된 시장 만나서 심하게 당해봐야 한다”는, 자해 수준의 ‘국민미개발언’ 버전2도 들었다.



 이해는 가지만 영어 ‘이디엇’(idiot·바보, 얼간이)은 ‘이디오테스(idiotes)’에서 나온 말이고, ‘이디오테스’는 투표 안 하는 사람을 말한다.



 한 표의 가치는 크다. 지난 3회 지방선거 당시 인천시 부평구, 원주시, 충주시 의원 선거가 한 표 차로 결정 났다. 내 한 표. 헐값이 아니다.



 “ 앤 닉슨 쿠퍼는 오늘 줄을 서서 투표로 권리를 행사한 수많은 사람과 같습니다. 단 하나 다른 점은 106세의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2008년 오바마의 대통령 수락연설 중 일부다.



 “태어난 시기에 앤 닉슨 쿠퍼와 같은 사람은 투표를 할 수 없었습니다. 첫째는 여성이었기에, 둘째는 피부색 때문이었습니다. … 오늘 밤 저는 가슴앓이와 희망, 투쟁과 진보 사이에서 ‘너희는 할 수 없다’는 말을 듣던 시절 ‘그래,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는 신념을 품고 밀고 나간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앤 닉슨 쿠퍼가 투표일에 백인과 ‘겸상’을 할 수 있기까지는 피와 눈물의 역사가 있었다.



 민주주의는 투표권 쟁취의 역사다. 1987년 민주화운동이 없었으면 대한민국도 오는 6월 4일을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의 ‘타는 목마름’. 벌써 전생의 일이 된 건 아니길.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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