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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 고시원 식당주인 야반도주 … 몇 달치 식권 휴지조각

중앙일보 2014.05.31 02:58 종합 16면 지면보기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왼쪽 사진)은 점심시간에도 주변이 한산하다. 2008년 로스쿨제 도입 및 사법시험 폐지가 확정된 이후 풍경이다. 반면에 7·9급 공무원과 경찰시험 준비생이 몰리는 노량진 고시촌(오른쪽 사진)은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다. [박종근 기자]


신림동이 지고 노량진동이 뜬다? 꼭 그렇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생존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어서다. 국내 고시촌 업계 얘기다. 2008년 사법제도의 근간이 로스쿨제로 바뀐 이후 양대 산맥인 서울 관악구 신림동과 동작구 노량진동 고시촌에는 적잖은 변화가 나타났다. 사법시험 전면 폐지(2017년)를 3년 앞둔 현재 신림 고시촌은 고시 준비생이 계속 빠져나가면서 예전 같지 않아졌다.

명암 갈린 서울 신림동·노량진 고시촌



상권도 침체 상태다. 반면에 공무원시험 학원이 몰려 있는 노량진 고시촌은 이른바 ‘공시족(公試族)’들로 활황이다. 최근 들어 사시와 행시 수험생은 신림동 고시촌, 7·9급 공무원과 경찰 준비생은 노량진 고시촌이라는 경계도 무너지는 추세다. 신림 고시촌의 빈 공간으로 일부 공시 학원들이 파고들어 오면서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관악구 대학동 우리은행 신림로지점 앞. 버스정류장·학원·식당 등이 몰린 이곳은 신림동 고시촌에서 ‘만남의 장소’로 통한다. 하지만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싼값에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주변 식당도 비슷했다. 점심시간임에도 절반 정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세월호 여파도 있지만 몇 년 전부터 움츠러들기 시작한 경기가 좀체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게 주민들 얘기였다.



 식당에선 공무원 5급 공채시험(행정고시) 준비생 김모(28)씨와 오모(31)씨가 밥을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선 ‘형평성’ ‘현대판 음서제’ 등의 단어가 자주 나왔다. 이날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대국민 담화에서 공무원 임용과 관련해 ‘민간 채용을 늘리고 고시를 점진적으로 축소 폐지하겠다’고 밝힌 것을 두고서였다.



실제로 정부는 23일 차관회의에서 5급 공채시험 선발인원을 2017년까지 현재의 50%로 단계적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김씨는 “올해 합격하면 문제가 될 게 없다”고 했다가도 “민간 전문가 채용을 늘리다 보면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 자녀 특채 사건 때처럼 사회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신림 고시촌의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취재에 응하지 않으려 했다. 대부분 “여러 번 기사가 안 좋게 나가 상권이 더 나빠졌다”고 하소연했다.



 조금 더 올라가자 대학동 치안센터 옆 골목이 나왔다. 지난 3월 14일 열린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토론회’ 안내 플래카드가 개최된 지 두 달이 넘었는데 그대로 걸려 있었다. 인근 상점 앞에는 사법시험 존치 찬성 서명을 받는 용지가 놓여 있었다.



 고시생들로 넘쳤던 신림동 고시촌 풍경이 변한 건 2008년부터다. 그해 정부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도입하고 2017년 사법시험 전면 폐지를 결정했다. 로스쿨 출범 후 사시생이 줄기 시작했다. 선발인원이 800여 명이던 2010년 사시 1차에 2만3244명이 지원했다. 200명만 뽑는 올해 지원자는 7428명이다. 신림 고시촌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사시생이 감소하며 전체 고시생도 줄기 시작했다. 2010년 4만 명에서 지금은 1만5000~2만 명 정도다.



 고시생 감소는 고시촌 주변 원룸과 고시원에 직접적인 타격이 됐다. 고시촌 내 S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 김모(57)씨는 “1년 전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45만원 하던 원룸이 지금은 보증금 100만원에 35만원으로 낮췄는데도 잘 안 나간다”고 말했다. 일부 고시원에선 식당 주인이 야반도주해 몇 달치 식권이 휴지 조각이 되기도 했다.



 신림 고시촌 J독서실 관계자는 “먹고사는 게 걱정”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는 “5년 전만 해도 1~2개월은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요즘은 기본적으로 30~40%가 공실”이라며 “세금과 전기료를 생각하면 80%는 돼야 한다”고 말했다.



 주변에 즐비했던 고시 식당 등은 유흥주점과 식당들로 대체됐다. 값싼 방을 찾아 신림동으로 모여든 직장인을 겨냥해서다.



 실제 대학동의 주민등록 인구는 고시생 감소에도 불구하고 2008년 2만3037명에서 2012년 2만3283명으로 소폭 증가했다. 한 공인중개소 관계자는 “2~3년 전부터 값싼 원룸을 구하는 직장인이 늘었다”며 “이 중엔 일용직 종사자들도 꽤 있어 동네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고 말했다. 1980년대부터 각종 고시 정보가 모이는 공간이었던 ‘광장서적’의 몰락은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광장서적은 지난해 1월 1억6000만원 상당의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를 내고 문을 닫았다.



 반면에 노량진 고시촌은 공시족들로 여전히 성황 중이다. 사회·과학 등 고교 과정이 공무원 시험에 도입되면서 진입 장벽도 낮아졌다. 경찰공무원도 박근혜 정부에서 총 2만 명이 증원될 계획이다. 이로 인해 지난해 9급 공무원시험엔 사상 최대 인원인 20만여 명이 지원했다.



 19일 오전 10시 노량진 A공무원시험준비 학원은 인기 강사 수업을 들으려는 학생들로 300명 정원의 대형 강의실이 꽉 찼다. 강의실이 있는 5층에서 2층 복도까지 줄이 길게 늘어섰다. 대학 4학년을 휴학하고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이진형(26)씨는 “7급과 지방 공무원 필기시험이 6, 7월에 있는데 열기가 상당하다”며 “그나마 국가직 9급 시험이 4월에 끝나 사람이 줄었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엔 노점에서 2500원짜리 컵밥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학생들로 도로가 꽉 찼다. 카페에서도 취업준비생들이 책을 펴고 공부에 몰두했다. 김보미(25·여)씨는 “노량진에서 카페는 암묵적으로 공부 장소로 통용돼 오랜 시간 공부해도 어색하지 않다”고 말했다. 노량진 B공인중개사 오모(59)씨는 “20대 중반~30대 초반 청년층 수험생 방문자를 중심으로 원룸 수요가 꾸준히 있다”며 “지난해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이던 15㎡의 원룸이 올해는 월세 5만원 올랐어도 빈방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노량진 C고시학원 관계자는 “자격시험인 사시나 로스쿨과 달리 공무원은 취업이 보장되고 구조조정 위험이 적어 인기가 식지 않는다”며 “노량진에서 공부하는 공무원, 경찰, 교사 준비생만 2만∼3만 명”이라고 말했다.



 ◆신림 고시촌의 반격?=이에 따라 생존경쟁의 전쟁터에 선 신림 고시촌도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우선 ‘로스쿨 변호사시험(변시) 불합격자’ 유치에 힘쓰고 있다. 올해 변시 합격자는 지원자 2432명 중 1550명(63.7%)이다. 불합격자 882명은 내년에 재도전해야 한다. 신림 V법학원 관계자는 “최근엔 사법시험 수업보다 변시 수업 비중을 늘리고 있다”며 “변시 불합격자가 해마다 400명씩 증가하면 사시생 감소로 인한 수익 감소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과거보다 2만 명 가까이 줄어든 사시생들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여전히 역부족이다. 신림 고시촌 일대에는 최근 경찰학원과 공무원 준비 학원이 하나 둘씩 들어오고 있다. 고시서점엔 사시와 행시 수험서 외에 7·9급 공무원, 경찰공무원 시험 교재가 부쩍 늘었다. 문을 닫은 광장서적 자리에 지난해 8월 일반 서점인 ‘북션’을 연 정성훈 대표는 “초기 사시·행시 서적과 일반 공무원 서적 판매 비율이 7:3이었지만 지금은 5:5 수준”이라며 “인터넷 판매까지 합하면 공무원 서적이 사시 수험서 판매량을 앞질렀다”고 말했다. 수험생 강인화(34)씨는 “예전엔 신림 고시촌에선 눈치가 보여 7·9급 공무원 시험 교재도 함부로 펴지 못할 정도였다”며 “지금은 카페나 독서실에서 당당히 책을 보는 인원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신림동 A행정고시 학원 관계자는 “수험생들이 시험 준비에 필요한 각종 시설이 잘 갖춰진 곳은 ‘신림 고시촌’이 최고라 사시가 아니라도 다른 수험생들을 끌어들일 여건이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노량진 고시촌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신림동의 열악한 교통상황 때문이다. 노량진 공인중개업자 박모(42)씨는 “노량진은 지하철1·7·9호선이 지나가는 교통여건을 갖춰 수도권에서 통학하며 공부하는 인원만 전체의 40%”라며 “신림동 고시촌의 열악한 교통환경은 이를 흡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림 고시촌 상인들은 내년에 개통 예정인 강남순환고속도로와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착공하는 경전철 신림선(여의도~서울대)에 기대를 걸고 있다. 신림동에 거주하며 노량진에서 공부한다는 고인선(32)씨는 “밥값과 집값 등 각종 인프라는 신림동이 더 좋다”며 “교통이 편리해지고 좋은 공무원 학원들만 들어온다면 신림 고시촌에서 공부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글=이승호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집값 싸 직장인·신혼부부도 고시촌 찾아



신림 고시촌은 옛 신림9동·2동(대학동·서림동) 일대에 형성됐다. 초기엔 빈민촌이었다. 1960년대 강북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밀려난 철거민들이 정착했다. 75년 서울대가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하고 84년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서울대생 등 사법고시 준비생들은 정보 교류와 주거비용 절약을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지금과 같은 고시학원, 서점, 독서실, 복사집, 고시원, 고시식당을 아우르는 인프라는 90년대에 갖춰졌다.



신림 고시촌은 서울시 역사의 하나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지난 3월부터 신림 고시촌 일대 생활상을 영상과 사진으로 담는 작업을 시작해 10월까지 마무리할 방침이다. 윤남륜 학예연구사는 “신림 고시촌은 서울대와 고시란 현상이 만든 독특한 교육공간”이라며 “사시제도 변화 등으로 신림 고시촌만의 특수한 주거생활문화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길 것”이라고 말했다.



 동작구 노량진동 일대에 자리 잡은 노량진 고시촌은 대학입시 학원가로 출발했다. 70년대 말 정부가 강북 인구의 밀집을 해소한다며 종로에 있던 종로학원 등을 노량진으로 옮기도록 하면서다. 노량진에 수험생 관련 시장이 형성되면서 유동인구가 많아졌다. 7·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도와주는 고시학원들도 생겨났다. 2000년대 초부터 대치동을 비롯해 강남 일대가 사교육 중심지로 부상하자 여기에 있던 입시학원들이 대거 강남으로 옮겨갔다. 공무원 선호 현상이 계속되면서 노량진에는 고시학원이 주류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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