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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백화점에서 벌이는 흥정 배틀

중앙일보 2014.05.28 00:05 강남통신 1면 지면보기


깎아줄 때까지, 진격!

백화점서 제값 주면 '호갱님'?
10분 흥정에 양복 20만원↓ TV 200만원↓?



백화점에선 품위를 지켜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가격표에 적힌대로 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판매사원과 치열한 심리 전투를 치르고 원하는 값을 받아내는 흥정의 전장(戰場)이랍니다.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 차표 파는 아가씨와 실갱이하네 이 세상에 에누리없는 장사가 어딨어 깎아달라 졸라대니 원 이런 …. ’



코미디언 서영춘이 1960년대에 내놓은 코믹한 노래 ‘서울구경’ 도입부다. 이렇게 에누리라고 하면 보통 값을 깎는 걸 생각하지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물건값을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부르는 일, 또는 그 물건값’이라는 정의가 맨 앞에 나와 있다. 장사꾼이 제값보다 비싸게 불렀으니 깎아달라고 흥정을 할 수밖에-.



반대로 에누리 없는 값을 정가(正價)라고 하는데, 백화점 등 물건마다 정가(定價)를 붙여놓은 곳에선 당연히 정가(正價)를 부를 터이니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 서로 깎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한다. 아니, 지금까지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 런. 데. 백화점에서 흥정을 한다.



거꾸로 과거엔 흥정 없이 사면 바보 소리 듣던 시장에서는 철저하게 가격정찰제를 지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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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 상관없이 에누리 … 모르는 고객만 손해

입점 매장들, 본사의 실적 압박에 흥정 나서

백화점은 많이 팔수록 수수료 더 챙겨 모른척



수입차 등 럭셔리 시장 정가 깨진 지 오래

“고급 제품일수록 거품이 많다는 의미”

동대문 패션몰 등 시장에선 되레 정찰제




지난 17일 반포 신세계 백화점 강남점 가전제품매장. LG 매장에 전시된 65인치 울트라 HD TV에 ‘903만원’이라고 적힌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한 손님이 관심을 보이면서도 뭔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판매직원은 “견적을 내주겠다”며 종이에 ‘가전회사 특별할인’ ‘구매 가격별 백화점 할인’ 등 여러 항목을 죽 써내려가더니 “현금으로 사면 676만 8000원에 주겠다”고 제안했다. 정가와는 무려 200만원 넘게 차이가 났다. 손님이 할인가를 적은 종이를 가져가려 하자 직원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며 얼른 종이를 채갔다.



같은 날 롯데 백화점 잠실점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이곳은 처음부터 가격표에 ‘5월 할인가 860만원’이라고 붙여놨다. 그런데 이것도 진짜 가격이 아니었다. 판매직원이 각종 할인 항목을 나열하더니 신세계의 최종 제시가격보다 10만원 가까이 더 비싼 686만4000원을 불렀다. 흥정을 할수록 가격은 더 내려갔다. 결국 이 직원은 흥정 10분 만에 “파격가”라며 “현금으로 사면 660만원까지 해주겠다”고 말했다.



혹시 초고가(超高價) 전자제품 매장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그래서 백화점 신사복 매장에도 가봤다. 가격 흥정을 하자마자 판매직원은 곧바로 “VIP고객가로 5만원을 빼주겠다”고 말했다. 똑같이 75만원짜리 로가디스 컬렉션인데 신세계 강남점과 롯데 잠실점,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서 최종적으로 부른 가격은 60만원과 55만원, 57만원으로 제각각이었다. 가격표에 적힌 가격만 보고 75만원을 다 냈다면 흥정한 고객보다 최소 15만원에서 20만원을 더 내고 산 셈이 된다.



여모(31·경기 용인시)씨는 지난해 말 결혼을 앞두고 혼수품 장만을 위해 현대와 롯데 미아점에 갔다가 이런 불편한 현실을 알게 됐다. 이씨는 500만원이라고 가격이 붙은 한 미국 브랜드 소파를 사려고 했다. 여씨는 “처음 롯데에 갔더니 50만원을 깎아주겠다기에 혹시나 싶어 현대에 가서 알아보니 100만원 가까이 깎아주는 건 물론이요 5개월 무이자 할부까지 제시하더라”며 “싸게 사긴 했지만 백화점에서도 흥정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좀 씁쓸했다”고 말했다. 그는 “제 가격 주고 샀으면 억울할 뻔 했다”며 “마음 한 편에선 혹시 제대로 못 깎아서 비싸게 주고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일부 소비자는 “흥정하는 데 힘 쓰고 싶지 않아 값은 좀 비싸도 일부러 믿을 수 있는 백화점에 간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이런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는 거다.



강남에서 두 자녀를 키운다는 한 주부(38)는 “못 깎는 게 바보”라며 “럭셔리 패션 브랜드도 가격 흥정을 하면 5~10% 정도는 깎아 준다”며 “남들은 창피하게 백화점에서 무슨 흥정을 하냐고 타박하지만 내막을 아는 사람은 다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쇼핑 ‘빠꼼이’인 직장인 김모(33·여·서초구 방배동)씨는 “백화점 매장에 들어서면 몇 퍼센트나 할인이 가능한 지부터 묻는다”며 “남편 양복 사러 신사복 매장에도 자주 가는데 특히 신사복은 어느 백화점이든 무조건 할인을 해준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올 설에 가족 선물용으로 반포 신세계백화점 식품관에서 62만원짜리 한우세트를 50만원에 사기도 했다”고 알려줬다.



겉으로는 철저한 정가제인 백화점에서 이렇게 흥정이 벌어지는 이유는 뭘까. 유통 구조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백화점은 입점한 매장들로부터 판매 수수료를 받는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백화점별 수수료를 분석한 결과 롯데·현대·신세계 백화점의 평균 수수료율(매장 총 판매액 대비)은 28.9%였다. 입점업체가 많이 팔아야 백화점 수익이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백화점 측에서도 정가제를 지키지 않아도 눈을 감아주는 거다.



최재섭 남서울대 유통학과 교수는 “백화점 입장에선 개별 입점업체가 제품가격을 더 받든 덜 받든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오직 그 매장의 총 매출액만 높으면 된다”며 “소비자를 고려하지 않고 유통업체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개별 업체의 판매직원이 실적압박을 과하게 받는 것도 흥정을 불러일으키는 한 요인이다. 숍마스터(Shop master)라고 불리는 해당 브랜드의 판매직원은 본사에서 목표 실적을 받는다. 할인된 가격에 물건을 팔면 일단 총 판매액이 늘어나니 마진을 덜 남기더라도 할인으로 고객을 유인하는 거다.



이정희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교수는 “백화점에서 정기 할인행사를 하는 걸 하이엔드 로우프라이스(High end low price·고급품 저가전략)라고 하는데 비싼 고급 제품을 일시적으로 싸게 팔아 고객이 오도록 만드는 전략”이라며 “백화점에서의 흥정은 음성적인 하이엔드 로우프라이스 전략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흥정을 통해 단기적 성과를 낼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론 백화점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백화점은 매장별 판매분(매출)만 확인하고 이에 따른 입점 수수료를 받는 구조라 관리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백화점 직원이 할인하는 판매직원을 적발한다 해도 직접 징계는 못하고 해당 브랜드에 알려 인사조치 등을 권고한다”고 말했다.



사실 백화점만이 아니다. 정찰제는 수입차 매장 등 럭셔리 제품을 파는 곳에선 무너진 지 오래다. 특히 수입차 업계에선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며 “국내 수입차 시장이 커지면서 경쟁이 치열해진 결과”라고 말한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올 1~3월 평균 수입차 국내 점유율은 13.94%였고, 강남구는 이보다 높은 17.5%였다. 수입차의 국내 점유율이 계속 늘면서 업체간 경쟁은 더 과열양상을 띤다는 거다.



BMW 강남구 도산공원 매장.
BMW의 수입판매업체 중 하나인 코오롱모터스 매장을 가봤다. 도산공원점에 들어서자마자 영업사원이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느냐”고 말을 붙였다. 중형 디젤 모델인 320d는 팸플릿엔 정가가 4760만원으로 적혀 있었지만 이 사원은 “프로모션 기간”이라며 “600만원을 할인해주겠다”고 했다. 똑같이 코오롱모터스인 대치동 BMW 매장에서는 결국 이보다 30만원을 추가로 할인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수입차의 할인폭은 딜러업체의 지원, 그리고 개별 영업사원이 자신의 커미션 몫을 조금 덜 가져가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정보가 많을수록, 다시 말해 발품 팔아 여러 매장을 돌며 흥정에 흥정을 거듭할수록 싸게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전직 수입차 영업사원이었던 이모(40)씨는 “기존 고객 소개로 판매가 많이 이뤄지는 수입차 시장 특성상 소개로 왔거나 재구매하는 고객에겐 추가 할인을 해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영업사원 이모(48)씨도 “영업사원은 판매가 대비 1~2%의 수수료를 받는다”며 “이를 포기하고 할인해주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매장에서도 역시 영업사원별로 목표 판매 대수가 정해져 있기에 이런 기형적인 흥정이 벌어진다. 이씨(48)는 “목표를 채우면 인센티브(달성 축하 금액)가 나오는데 이를 미리 감안하고 일단 손해보고 팔기도 한다”며 “이런 시장 구조를 잘 알고 오는 고객은 아무래도 더 많이 할인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딜러업체는 다달이 할인가를 바꾸고, 여기에 영업사원의 개별 할인이라는 변수가 더해지니 고객 입장에선 ‘고무줄 가격’이 되고 마는 거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수입차 시장 가운데서도 프리미엄급으로 올라 갈수록 할인 폭이 더 크다”며 “고급 제품일수록 정가(定價)라고 매겨진 가격에 거품이 많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는 “치열하게 경쟁하다보니 빚어진 상황이지만 결국 악수(惡手)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가격 정찰제가 잘 지켜지고 있는 곳은 없을까. 그릴 리가. 흥정의 대명사였던 시장에서는 의외로 철저하게 정가제가 운영되고 있다.



패션몰인 동대문 롯데피트인과 두타가 대표적이다. 롯데피트인은 지난해 문을 열 때부터 가격정찰제를 시행하고 있다. 매장 내 스피커에선 ‘신고포상제’를 알리는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가격정찰제 미시행, 신용카드 결제 거부, 현금영수증 미발행을 했을 때 신고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근처 두타도 11년 전부터 가격 정찰제를 하고 있다. 지난 16일 찾아가서 한번 흥정을 해봤다. 그러나 두타의 한 점원은 “깎아 줄 수 없다”며 “이를 어긴 매장이 있었는데 매장 앞에 이용 금지 선을 묶어 놓고 영업 정지를 시키더라”며 “그걸 보고나니 가격 흥정은 꿈도 안꾼다”고 했다.



한때 외국인에게 바가지 요금 씌우기로 악명이 높던 남대문 시장도 가격 정찰제가 잘 지켜지고 있다. 불과 2년 전인 2012년에 밤에 들어서는 포장마차들이 외국인에게 음식값을 터무니 없이 비싸게 판다는 언론 보도가 잇따르자 관할 기관인 중구청이 그해 7월 ‘가격표시제’를 밀어부치며 단속을 강화했다. 정대용 중구 시장경제과 주무관은 “담당 직원 2명이 아직도 주 2~3회씩 현장 단속을 하고 관광 성수기인 4·10월엔 공무원 10명을 투입해 집중 단속을 벌여왔다”고 말했다.



남대문 상인들은 가격정찰제에 대체로 만족해 하는 분위기다. 기념품점을 운영하는 황명순(58)씨는 “가격정찰제 시행 후 장사하기 편해졌다”고 말했다. 황씨가 파는 품목은 열쇠고리나 부채·젓가락 같은 비교적 싼 기념품이지만 모두 판매가격표가 붙어 있고, 실제로 그 값에 팔고 있었다. 건강식품점 남산상회를 운영하는 박칠복(61)씨는 “한 두 집은 바가지 씌울 지 몰라도 대부분은 정찰제를 잘 따르고 있다”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님한테 외면 받아 결국 다 같이 죽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정숙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정찰제를 시행하면 선(善)이고, 흥정을 하면 악(惡)이라고 볼 수는 없다”면서도 “중요한 건 업체가 먼저 거품을 없애 소비자가 기꺼이 지불하려는 가격(wiling to pay), 즉 합리적인 가격을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안혜리 기자

,조한대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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