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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NIE] 정조의 개혁은 왜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중앙일보 2014.05.28 00:01 Week& 6면 지면보기
조선시대 정조는 드라마·영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임금이다. 삶이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을 지켜봤다. 그런 상처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른 뒤 수원화성 축조, 규장각 설치, 금난전권(정부가 인정한 상인이 민간 상인을 단속할 수 있는 권리) 폐지 등 정치·경제 질서를 혁신하는 정책을 폈다. 조선 후기 ‘개혁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직후 조선은 60년 간 특정 가문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세도정치를 겪으며 쇠퇴한다. 개혁 군주 이후 세도 정치 등장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조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최근 그가 손수 쓴 편지들이 200여 년 만에 잇따라 공개되면서다. 교과서와 언론은 정조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정조(1752~1800)



조선의 22대 임금. 영조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이산(李蒜). 열 살이던 1762년 사도세자가 죽자 왕세자가 됐고,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등지자 스물네 살에 임금이 됐다. 즉위 첫해에 규장각을 세워 국왕 직속 정책연구소로 활용했다. 정조는 당시 벼슬에 오를 수 없었던 서얼 신분을 규장각에 적극 등용했는데 이들은 정조가 실시한 개혁 정책의 지지 기반이 됐다. 정조는 또 1785년엔 왕실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해 왕권을 뒷받침할 군사 기반을 세웠다.



 정조의 핵심 정책은 탕평책이다. 영조를 계승한 정책으로 조정 요직을 특정 붕당에 몰아주지 않고 여러 붕당에 안배해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도 정조의 대표적 치적이다. 경기도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세운 성곽이다.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한 수원화성은 정치·군사·상업적 기능을 두루 갖추고 있다.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 정치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정조가 48세로 세상을 떠나자 어린 순조가 즉위했다.



조선조 풍속화의 대가 단원 김홍도가 정조대왕에게 진상한 병풍.
정치적 라이벌

노론 벽파, 그리고 탕평책




 개혁 군주로 평가 받는 정조지만 그의 일생은 순탄치 않았다. 무엇보다 아버지(사도 세자)가 할아버지(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초유의 사건이 컸다. 사도 세자는 노론 세력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이들과 갈등을 빚었다. 사도 세자 사후 붕당은 크게 벽파와 시파로 나뉘었다. 리베르는 “대부분 노론이었던 벽파는 사도 세자의 죽음을 당연하게 보고 영조의 처분도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소론과 노론의 일부, 그리고 정계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다수가 속한 시파는 사도 세자의 죽음을 동정하였다”고 적고 있다.



 영조가 정조에 앞서 탕평책(蕩平策)을 펴기는 했지만 붕당 정치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노론에 의존한 면이 컸다. 교학사는 “영조 말년에 노론 중 일부가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이 되었고, 노론의 정치적 세력이 강화되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썼다. 이런 노론 세력은 사도세자 아들이 임금이 되는 것을 우려했다. 이들은 정조가 왕세자로 책봉되자 그를 비방하는 투서를 돌렸다. 또 왕위에 오른 후에는 정조 처소에 괴한이 침입하는 사건도 잇따랐다. 정조는 노론 벽파를 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인식하고 경계했다. 정조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정조와 노론 벽파 간의 갈등이 빠지지 않는 까닭이다.



정조의 장례를 치를 때 능으로 가는 당시의 행렬을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이 `정조대 왕국장의궤`?에 실려 있다. [사진 문화재청]


왕권 강화, 미완의 개혁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 정조는 왕권이 보다 강력해질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규장각과 장용영 설치로 이어졌다. 규장각이 왕권의 학문적 기반이라면, 장용영은 군사적 기반이었다. 장용영은 서울과 수원에 배치됐는데, 한양과 외곽 경비를 담당하던 부대인 5군영을 능가하기도 했다.



 규장각은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씽크 탱크’였다. 미래엔은 “규장각이 왕실 도서관, 그리고 왕의 판단을 뒷받침하는 비서실 기능을 했고, 과거 시험과 관리 교육까지 담당했다”고 적고 있다. 정조는 젊고 재능 있는 문신을 뽑아 규장각에 배치하고 연구에 전념하게 했다. 대표적인 학자가 정약용이었다. 또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등 서얼 출신 4명을 검서관 자리에 앉혔다. 이들은 박지원 제자로 이후 실용적 학풍의 북학파를 이끌었다. 정조가 서얼에게 벼슬을 준 것은 매우 개혁적인 인사였다. 교학사에 따르면 정조 이전까진 양반이 첩에게 낳은 자제, 즉 서얼은 벼슬을 할 수 없었다. 이를 불만스러워 한 서얼들은 꾸준히 상소를 올렸고, 정조는 즉위 이듬해 서얼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규정을 마련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권 강화와 정치 안정은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조선은 헌종과 철종에 이르기까지 60년 간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기를 맞게 된다. 왜 이렇게 됐을까. 비상교육은 “정조의 탕평 정치는 붕당 간의 대립을 완화하였지만, 정치 권력이 왕과 그 주변의 소수 정치집단에 집중되었고, 이는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전개되는 배경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천재교육도 “탕평정치가 자기 이익을 앞세우던 붕당을 억누르고 민생을 중시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개혁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러한 발전은 정치체제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국왕 개개인의 능력에 의존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래엔은 “탕평책이 붕당 자체를 없앤 것이 아니라,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붕당 간의 정쟁을 조정한 미봉책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지학사도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은 국왕 개인의 역량에 의존한 것이었으며 인사제도나 권력구조를 체계화 한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정조는 이를 예상 못했을까. 교학사는 “정조는 자신의 사후에 왕권이 흔들릴 것을 걱정하여 생전에 세자(순조)에게 정치적 힘을 만들어주고자 노론 시파였던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정조 사후 권력은 김조순이 장악하였고, 이로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서찰 정치. 새롭게 관심 얻는 정조



성군(聖君)으로만 알려져 있던 정조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사건이 2009년 벌어졌다. 정조가 쓴 어찰(御札, 임금이 쓴 편지) 299편이 발굴, 공개되면서다. 어찰 수신자는 정조의 정치적 라이벌로 알려져 있던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 심환지(1730~1802)였다. 정조는 이 편지에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면서 심환지와 정사를 논의한다. 또 못마땅하게 여기던 신하를 거침없이 비판하기도 한다.



 편지는 정조가 죽기 직전까지 4년 간 쓴 것이었다. 언론은 어찰을 소개하며 “군주는 거침없었다. 이름 높은 고관·학자들이 질펀하게 욕을 먹었다. 학문을 사랑한 성인풍의 군주로 평가받던 정조. 그의 이면은 달랐다”고 평가했다(중앙일보, 2009년 2월 10일자 1면 “감히 주둥아리를…호로자식”…성군 정조 속 인간 이산을 보았다). 그러면서 “노론 벽파는 정조의 최대 적대세력으로 평가돼 왔다. …벽파는 정조가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국정 파트너’였고, 심환지는 정조의 ‘복심’을 펼치는 최측근 신료였을 거란 해석이다”고 썼다.



QR코드를 찍으면 정조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알려진 그대로의 모습도 있다. 어찰에 나타난 정조는 열심히 공부하는 군주였다. 언론은 “서찰에서 ‘책 읽느라 바쁘다’는 이야기도 흔히 등장한다. 정조가 정사에서 알려진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군주였다”고 적었다(중앙일보 2009년 2월 10일자 23면 격정·열정·애정…그도 인간이었다).



 이밖에도 신문은 정조가 신하를 배려하는 섬세함도 긍정적으로 보았다. “정조는 규장각에 최정예 관료 양성 코스를 두고 이들의 시험출제부터 채점까지 직접 챙겼다. 정조는 국왕이 직접 친필로 성적을 매겨줘야 선비들의 사기가 높아진다며 의욕을 보였다”(중앙일보 2009년 10월 28일자 39면 악기 조율 챙기던 ‘천의 얼굴’ 정조).



글=성시윤 기자

자문=중동고 최미정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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