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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이권 내줘야 했던 아관에서 황제 선포한 환구단까지

온라인 중앙일보 2014.05.26 00:10
문화유산국민신탁, 배재학당 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소년중앙 시간탐험대(이하 소중 시간탐험대)는 지난 17일 정동으로 2차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소중 시간탐험대] ②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고종의 행적을 찾아가는 답사였습니다.



환구단 황궁우 내부를 살펴보고 있는 소중 시간탐험대 1조 대원들. 왼쪽부터 손예진(서울 수명초 4)·성다연(경기도 보평초 6)·이정민(서울 고원초 6)·조현준(경기도 성남 구미초 5)·김나영(서울 신길초 5)·박제하(경기도 일산 신일초 5).


1 코스 | 중명전~구 러시아 공사관



소중 시간탐험대는 중명전에 모여 2차 답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옛 러시아 공사관으로 출발했다. 옛 러시아 공사관은 예원학교와 캐나다 대사관 사이 언덕 위에 있었다. 언덕 초입부터 너머까지 전부 19세기 러시아 공사관이 자리하던 곳이다. 외국 공사관 중에 가장 큰 규모였다. 언덕 초입에는 개선문을 닮은 아치형의 석조문 러시아 게이트가 있었다. 공사관 건물은 게이트를 지나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한국과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는 러시아 공사관에 관한 첫인상을 이렇게 남겼다. “높은 언덕은 러시아 공사관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높은 탑과 화려한 정문은 이 도시에서 매우 이채로웠다.”



화려하고 웅장했던 러시아 공사관은 6.25전쟁 때 대부분이 파괴되고 지금은 전망대 역할을 했던 흰색의 3층 첨탑(사적 제253호)만 남아있다. 소중 시간탐험대는 그 앞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정동의 풍경을 바라봤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의 김진형 연구원은 “러시아 공사관이 정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첨탑 꼭대기에서는 경복궁·경희궁·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모두 볼 수 있었다”며 “당시 정동은 여러 나라의 공사관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위기 시 서로 돕기도 했지만 조선에서 이권을 먼저 갖기 위해 치열한 눈치작전도 펼쳤다. 러시아 공사관은 다른 나라의 공사관의 동태도 살필 수 있는 위치로 요지 중의 요지였다”고 설명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일본을 피해 경복궁을 빠져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이범진으로부터 고종의 의사를 전달받은 러시아는 러시아 군함을 인천에 파견하고 100여 명의 군인을 러시아 공사관에 추가 배치하는 등 고종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 러시아의 보호를 받게 된 고종은 조칙을 발표해 친일 내각의 대신들을 파면하고 친러 성향의 대신들을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을 발표한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게 되면서 조선 내 러시아의 입지는 달라졌다. 많은 이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열강과 맺은 조약에는 최혜국대우 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어느 한 나라가 이권을 가져가면 조약을 맺은 다른 나라들도 그에 상응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러시아가 고종의 신변보호를 내세워 이권을 가져가면 갈수록 다른 열강들도 이 조항을 내세워 이권을 가져갔다. 프랑스는 광산채굴권을, 미국은 금광채굴권을, 일본은 철도부설권을 가지고 갔다. 조선의 재정상태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하기까지 375일간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렀다.



1 소중 시간탐험대 대원들이 이화박물관 앞에서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을 찾아 사진을 찍는 미션을 수행하는 중이다. 2 3층 첨탑만 남아있는 러시아 공사관 앞에서 정동을 바라보고 있는 소중 시간탐험대 대원들. 3 환구단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 소중 시간탐험대 대원들. 왼쪽부터 엄윤빈(서울 신가초 5)·안민영(서울 신가초 5).


2 코스 | 덕수궁~환구단



옛 러시아 공사관에서 시청역 방향으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잔디가 펼쳐진 시청광장이 나온다. 시청광장을 가운데 두고 덕수궁 대한문과 마주보고 있는 고풍스런 문이 바로 환구단 입구다. 소중 시간탐험대는 1897년 10월 12일 새벽,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경운궁에서 환구단으로 향했던 고종의 발자취를 되짚으며 입구로 들어갔다.



김 연구원은 하늘과 땅의 모든 신령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 앞에서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은 고종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오직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중국의 외압 때문에 제천행사를 할 수 없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왕권강화 방법으로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청나라·일본과 대등한 황제국으로 선포한다.”



환구단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조선이 천자의 나라 중국, 천황의 나라 일본과 대등한 독립국가임을 보여주는 상징성을 갖는다. 또 왕권을 중심으로 근대개혁을 이루겠다는 고종의 의지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황제에 등극한 고종은 이후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한성에 전차를 개설하는 등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기울어진 국운을 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1913년 일제는 환구단을 훼손하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짓는다. 현재는 황궁우와 돌북 3개, 석조대문만 남아 있다.



글=황정옥 기자

사진=우상조 인턴기자

진행=이경희·박인혜 기자,

문화유산국민신탁=문승현 팀장, 김진형·임재영 연구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김진영 학예연구원, 송영미 에듀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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