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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고종은 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야 했나

온라인 중앙일보 2014.05.26 00:10
서울 중구에 있는 환구단의 황궁우.


소년중앙 시간탐험대가 두 번째 시간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두 번째 시간여행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있었던 1896년 2월 11일입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일시적으로는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만러시아에게 많은 경제적 이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자주 독립 국가를 꿈꾸던 고종의 희망은 이뤄질 수 있을까요.

[소중 시간탐험대] ②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기사는 1탄과 마찬가지로 두 파트로 나뉩니다. 그날의 사건을 토대로 재구성한 이야기와 소중탐험대가 다녀온 답사를 소중 독자들도 따라 갈 수 있도록 코스를 소개합니다.







1. 19세기 말, 정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던 러시아 공사관의 전경. 공사관 전망대에서는 경복궁·덕수궁·경희궁이 모두 보였다. 르네상스풍의 건물로 당시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랜드마크 같은 역할을 했다. 2.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포를 동원해 고종의 알현을 강요하는 일본군들. 3. 옛 환구단 전경.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조선을 황제국으로 선포하기 위해 경운궁 맞은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을 세웠다. 환구단은 하늘을 상징하는 원 모양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사진 속 왼쪽 건물인 황궁우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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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던 1896년 6월 9일 모스크바. 밀실에서는 일본의 전직 총리 야마가타 아리모토와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가 은밀히 협약을 맺고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와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남북으로 나눠서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저희가 관리하는 것이 어떨까요.”



“러시아는 생각이 다릅니다. 엄연히 국왕이 있는 나라를 다른 나라가 관리하면 안 되는 거죠. 왕후가 궁에서 죽임을 당할 정도로 시국이 어려운 나라를 러시아는 도와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럼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시국이 어려우니 일본과 러시아가 손잡고 도와주는 것은 어떨까요.”



“그게 좋겠네요.”



그들이 서로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 나라는 어이없게도 조선이다. 조선 대표는 한 명도 없이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을 두고 비밀협약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했다. 이 의정서에는 필요 시 러시아와 일본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조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을 두고 비밀협정을 맺는 것일까. 소중 시간탐험대 대원을 태운 타임머신을 따라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경복궁으로 가보자.



1895년 8월 22일 | 을미사변 이틀 후



“왕후 민씨는 자기와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짐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착취하고 짐의 정령을 어지럽혔다. 또한 군사를 해산한다고 짐의 명령을 위조해 사변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지난 임오년 때와 마찬가지로 홀로 몸을 피해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왕후의 작위와 덕에 타당하지 않다.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



1895년 8월 22일 경복궁 조정. 대소 신료들에게 명을 내리는 고종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찼다. 나타나지 않은 명성황후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명성황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거짓 명을 내리라고 요구하는 일본에 대한 분노였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은 경복궁에 군대를 배치하고 고종을 압박했다. 명성황후의 신분을 왕후에서 서인으로 강등하고 김홍집을 주축으로 하는 친일 내각을 구성해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 중에는 상투를 잘라 서양 복식에 맞게 바꾸라는 단발령도 포함돼 있었다. 조선 오백 년 역사는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이어졌다. 유교에서는 신체 모든 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으로 훼손하지 않는 것을 효의 시작으로 봤고 태어날 때부터 길러 머리에 올린 상투는 효의 상징이었다. 단발령은 조선 사람들에게 근본·뿌리를 없애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고종은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을 명하면서 동시에 왕세자와 함께 상투를 잘랐다. 국왕이 모범을 보이라는 일본의 압박 때문이었다. 일본에 의해 상투마저 잘린 왕.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경복궁에 갇힌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 궁을 나서는 두 대의 가마



“누구요?”



“접니다. 엄 상궁.”



엄 상궁은 허리춤에서 엽전 꾸러미를 꺼내 영추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찔러 준다. 병사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익숙한 듯 엽전 꾸러미를 받아 주머니에 넣고 문을 열어주며 웃으며 농을 건넨다.



“이러다 궁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겠소.”



“아이고 뭘요. 한두 개 없어진다고 티나 날까요. 전하가 찾기 전에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병사들은 엄 상궁을 보며 쑥덕거렸다. 엄 상궁은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명성황후에게 미움을 받아 10년 전 궁 밖으로 쫓겨났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일 만에 고종은 엄 상궁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엄 상궁은 쫓겨났던 한풀이라도 하려는지 새벽마다 가마 두 대를 대동하고 궁 밖으로 나섰다. 가마에는 엄 상궁이 빼돌리는 왕실 물건이 가득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날도 엄 상궁은 두 대의 가마와 함께 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바쁜 걸음이었다.



같은 시간 대정동(지금의 정동) 러시아 공사관에는 이범진과 이완용,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초초하게 엄 상궁의 가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복궁을 나섰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지난해 11월 28일,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려던 춘생문 사건이 발각돼 한차례 고초를 겪은 터라 안심할 수 없었다. 멀리 미국 공사관 정원 뒷길로 두 대의 가마가 부리나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범진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러시아 공사관 앞에 선 가마에서는 두 명의 여자가 내렸다. 자세히 보니 여장을 한 고종과 왕태자였다. 수척해진 얼굴로 여장을 한 고종을 본 이범진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전하” 목 놓아 불렀다. 고종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여장을 한 채로 조선 오백 년 정기가 흐르는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했다.



당시 조선에서 러시아를 ‘아라사(俄羅斯)’라고 불러 이 사건을 ‘아관(俄館)으로 몸을 피했다’라는 의미로 ‘아관파천’이라고 부른다. 아관파천 후 조선에는 친일내각이 사라지고 친러내각이 자리를 잡는다. 러시아는 고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벌채권, 인천 월미도의 저탄소 설치권 등 갖가지 이권을 차지했다. 다 잡은 토끼였던 조선을 놓친 일본은 러시아를 달래 유사 시 조선을 공동 점령한다는 골자의 일·러 비밀협정을 맺는다. 이 협정은 러일전쟁에서 1905년 일본이 승리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서양 의복을 차려입은 고종.
1897년 10월 12일 새벽 2시 | 환구단



1897년 10월 11일 오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환구단(지금의 명동 부근)으로 이르는 길 좌우에는 각 대대 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돼 있었다. 곧 고종의 행차가 있을 예정이었다. 왕을 호위하는 시위대들이 먼저 길에 들어섰다. 시위대들은 금실로 장식한 모자와 복장을 하고 허리에는 금줄로 연결된 은빛 군도를 찼다. 총 끝에 꽂힌 창에는 석양빛이 반사돼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시위대 뒤에는 황룡포(용이 수놓아져 있는 금색 옷)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가마를 탄 고종의 모습이 보였다. 뒤로 왕세자가 홍룡포(용이 수놓아져 있는 붉은 색 옷)에 면류관을 쓰고 붉은 가마를 타고 고종을 따르고 있었다. 고종의 행차는 환구단으로 이어졌다. 새벽에 있을 제천의식과 고종의 황제 즉위식 준비를 위해서였다.



환구단에서 고종은 잠시 1894년 종묘에서 있었던 고제를 생각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명분으로 조선 왕실이 청나라와 동일한 황제 체제로 전환할 것을 권했다. 마지못해 고종은 호칭을 ‘대군주 폐하’라고 정하고 선조들에게 알리는 제를 종묘에서 지냈다. 당시 청나라의 몰락을 믿지 않았던 조정의 대소 신료들은 대부분 청나라에서 ‘하늘 아래 두 임금은 없다’는 명분으로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반대했었다. 3년이 지난 지금, 전세가 역전됐다. 청나라는 조선보다 더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고 조정의 대소 신료들은 조선도 청나라·일본과 동일한 황제국가가 돼야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고종 역시 지난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 생활을 청산하고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왕권 강화책으로 조선의 황제국 선언을 계획했었다.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



1897년 10월 12일 새벽 2시. 고종은 환구단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늘이시여, 하늘의 아들로 받아주소서 그리고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을 보살펴주소서.” 고종의 답답한 마음을 아는 듯,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제를 마치고 환궁하는 고종황제에게 대한제국 국민들은 만세를 외쳤다. 한성에서 만세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만세는 황제국에서만 불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글=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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