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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한국은행도 줄인가

중앙일보 2014.05.22 00:36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1일 취임했다. 그는 취임 사흘째인 지난달 3일 한은 총재로서의 권한을 사실상 처음 행사했는데 그게 바로 사람을 자른 거였다. 대상은 전임 총재 ‘김중수의 사람’이었다. 국·실장 5명이 인사조치됐다. 인사철도 아닌 때라 “취임하자마자 전임 총재 흔적 지우기냐”며 안팎에서 말이 많았다. 한은 측은 “손보기용 인사가 결코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며칠 뒤 기자들에게 이 총재는 “손톱 밑 가시를 빼낸 것”이라고 말해 속내를 드러냈다.



 그즈음 한은 내부 게시판엔 이런 글이 올라왔다. “효경에 회총시위(懷寵尸位)라는 말이 있다. 임금의 총애를 받다가 물러날 때 물러나지 않아 화를 당한다는 교훈이다.”



회총시위.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 재상 이사가 진시황이 죽고 난 뒤에도 환관 조고 편에 붙어 권세를 누리려다 조고에게 실컷 이용만 당한 뒤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고사다. 한은 관계자는 “누가 봐도 ‘김중수 사람’의 대표주자인 박원식 부총재와 몇몇 부총재보의 퇴진을 요구한 글”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글들이 올라오는 것 자체가 신임 총재의 의중을 반영한 것 아니겠느냐”는 말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국실장 5명의 인사조치는 맛보기였음이 드러났다. 한 달여를 버티던 박 부총재가 지난 9일 ‘마침내’ 사퇴했다. 임기 11개월을 남기고서다. 말은 자진사퇴지만 박 부총재는 ‘타의’란 흔적을 많이 남겼다. 사퇴 전날까지도 그는 ‘사의표명설’을 완강히 부인했으며 사퇴 당일엔 입을 자물쇠처럼 꽉 다문 채 퇴임식도 거부했다. 부총재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다. 2003년 당연직 금융통화위원이 되면서부터는 중도 퇴진한 전례가 없었다. 이주열 총재 자신도 전임 김 총재와 크게 각을 세웠지만 부총재 임기는 마쳤다.



 부총재 퇴임도 끝이 아니었다. 며칠 후 강준오·강태수 부총재보의 사퇴설이 돌았다. 급기야 청와대까지 나서 이 총재에게 제동을 걸었고, 그제야 ‘김중수 지우기’가 조금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한은 출신 한 인사는 이를 ‘이주열식 정상화’라고 표현했다. “이주열식 정상화가 한은 내부에 주는 신호는 명확하다. ‘김중수는 외부 출신이다. 외부 출신 총재에 협력한 자는 (친일) 부역자와 같다. 그런 자들은 한은 출신이 다시 집권했을 때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이주열은 지난 3월 인사청문회에서 “(전임 김 총재와는 달리) 원칙을 지키는 인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 ‘원칙 인사’란 게 결국 ‘그들만의 리그’로 회귀하겠다는 뜻이었던 게다.



 소통을 못했다며 ‘불통 중수’로 불렸지만 김 전 총재의 한은 개혁만큼은 나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중수는 “한은 직원도 논문 써야 한다. 토론해야 한다. 토·일요일에도 e메일 열어놔라. 외국 시장 챙기고 들여다 봐야 한다”고 다그쳤다. 여성·박사·젊음을 중히 썼다. 볼멘소리가 곳곳에서 터졌지만 아랑곳 않고 밀어붙였다. ‘중앙은행은 한은맨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것’이란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이걸 되돌리는 건 다시 한은의 문을 닫아걸겠다는 뜻이다. 2200여 명 한은 직원은 한 해 평균 9400만원을 받는다. 차장급도 1억원이 넘는다. 안에만 잘 보이면 정년은 보장된다. 굳이 외부와 소통·협력할 이유가 없다. 정부 부처 등 외부에 협조하면 이단자·배신자로 몰리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이번 인사파동도 내부에선 쉬쉬 하지만 반기는 쪽이 우세하다고 한다.



 한은이 다루는 금리·환율·물가 같은 정책은 모든 국민이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공공재다. 한은 직원 월급은 발권력을 동원해서 준다. 나라가 망한다면 가장 마지막까지 월급을 챙겨갈 수 있는 곳이 한은이란 얘기다. 한은이 최고의 전문가 집단이어야만 하는 이유다. 그런데도 못된 정치판에서 하듯 전임자 흔적 지우고 자기들만의 성을 쌓는 데 혈안이 돼서야 국리민복을 위한 정책이 제대로 나오겠나. 거기에 앞장서는 게 총재여서야 되겠나. 그러니 새 총재 취임 두 달도 안 돼 벌써 구관이 명관 소리나 나오는 것 아닌가.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알려왔습니다 위 칼럼 내용과 관련, 한은은 이주열 한은 총재가 언급한 “손톱 밑 가시”는 개선이 필요한 규제를 언급한 것이며 인사발령 대상 국·실장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알려왔습니다. 또 일부 부총재보 사퇴설에 대한 청와대 개입설과 관련, 부총재보 인사는 외부기관이 간여할 사항이 아니며 이 총재는 부총재보 인사와 관련해 외부기관과 협의한 사실이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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