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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뒤집으면 사람·세상이 바뀝니다

중앙선데이 2014.05.17 00:35 375호 9면 지면보기
1 1층에 설치된 영국 미디어 아트 그룹 ‘유나이티드 비주얼 아티스트(UVA)’의 영상 작품 ‘여행의 리듬’과 양궁 과녁 같은 영상조각 ‘움직임의 원리’.
서울 도산대로 사거리. 해외 유명 수입차들이 거의 다 모여 있는 이 강남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지난 9일 현대자동차의 새로운 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하여 ‘현대 모터스튜디오 서울’이다. 인피니티 매장이 있던 6층 건물을 완전히 새롭게 리모델링했다. 그런데 이 공간, 지금까지 봐오던 자동차 영업 매장과는 확실히 다르다. 우선 1층에 자동차가 없다. 대신 거대한 영상 작품이 손님을 맞는다. 건물 외관 전면부 3개 면에는 유리 갑옷을 입혀 놨는데, 3개 층 창문에는 총 9대의 자동차를 90도(가운데 한 개만 45도)로 번쩍 올려다 붙여 놓았다. 가장자리를 에워싼 은색 파이프 라인 구조물 덕분에 꼭 상자 속 프라모델 장난감을 보는 느낌이다. 연결 부위를 잘라내고 파란색 자동차를 쏙 뜯어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현대 모터스튜디오 서울’ 탄생시킨 건축가 서을호

이 독특한 공간을 연출한 사람은 건축가 서을호(50) 서아키텍스 대표.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며 학부를 마쳤고, 하버드대 디자인 대학원에서 건축학 석사를 받았다. 그가 디자인한 현대자동차 인재개발원 마북캠퍼스는 ‘2013 레드닷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이번에 다시 현대자동차의 공간을 새로 만들어 내면서 그는 한국 자동차 문화의 기어를 하나 윗단계로 변속했다. 그는 무슨 속셈으로 이렇게 꾸며놓은 것일까.


반짝이는 철제 구조물의 나라였다. 출입문을 만져보니 양철같이 보였지만 부드럽게 맨질맨질했다. 전기아연도금한 강판이란다. 건물 전체를 굵은 국수 타래처럼 휘감고 있는 은색 파이프 역시 현대제철에서 만든 것을 현대 하이스코에서 도금처리한 것이다. 누군가 “제철 회사와 자동차 회사의 흔치 않은 연대”라고 설명했다.

층고가 높은 1층에는 55인치 LFD 패널들로 구성된 거대한 영상 캔버스가 펼쳐져 있었다. 실내 40개, 실외 74개로 구성된 미디어 월에서는 영국의 미디어 아트그룹 ‘유나이티드 비주얼 아티스트(UVA)’의 영상 작품 ‘The Rhythm of a journey(여행의 리듬)’가 흘러나왔다. “다들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앞만 보고 가잖아요. UVA는 이 점에 착안해 차창을 열고 옆 모습을 찍었어요. 그냥 지나쳐지는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되새겨보자는 의도입니다.” 큐레이터의 설명이다. 자동차 매장에 큐레이터라니.

그는 내친김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양궁 과녁 같은 작품 ‘Principles of Motion(움직임의 원리)’도 소개했다. 작은 레버는 관람객이 돌려볼 수 있다고 했다. 자동차의 움직임을 기하학적 패턴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은 영상 작품 밑에서 보니 다섯 개의 바퀴처럼 보였다.

엘리베이터 옆에는 여행 관련 아이디어 상품을 모아놓은 유리진열대가 있었다. 수저 2개와 포크, 나이프를 합치면 그 자체로 수저통이 되는 티타늄 제품. 컵 2개로 만들어진 보온병 등이 독특했다.

은색 파이프 난간을 잡고 계단을 걸어 복층인 2층으로 올라갔다. 자동차 전문 라이브러리다. “자동차 관련 철학, 관련 예술, 제작 기술, 레이싱, 각종 탈것 등 6개 카테고리 2500권에 달하는 전문 서적들을 갖춰 놨습니다.” 이번엔 사서의 설명이다. 도서관이니까. 프랑스 명품 브랜드 전문 출판사 애슐린이 만든 아트북 『CARS』를 비롯, 레이싱을 좋아했던 영화배우 스티브 매퀸 관련 도서, 여행 관련 서적들이 눈길을 끌었다. 배트카 미니어처 옆에 서 있던 배트맨의 망토가 바로 위 에어컨 바람에 절묘하게 휘날렸다. 책상 위에 설치된 파이프 모양의 스탠드가 유머러스했다.

2 현대 모터스튜디오 서울 외관 3 자동차 라이브러리 4 여행 관련 아이디어 상품들 5 3층 프리미엄 라운지 인테리어. 자동차 모양으로 만들었다.
6 3층 프리미엄 라운지에 진열된 고급차들. 정면에 에르메스와 협업한 에쿠스 리무진이 보인다.
층별로 다른 자동차 컨셉트 … 세밀하게 공간 연출
3층부터 5층까지가 비로소 자동차 매장이다. 3층은 럭셔리, 4층은 가족, 5층은 매니어로 컨셉트를 잡았다. 이곳에서 내방객을 맞는 젊은이를 ‘구루(Guru)’라고 부른다. 자동차 문화 전문가들이다. 항공사 승무원, 정비 기사, 카레이서, 리포터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14명의 남녀 구루들은 실버와 블루라는 컨셉트에 맞춘 유니폼을 입고 고객들이 부담 없이 차와 공간을 즐길 수 있도록 응대 요령을 넉 달간 교육받았다.

3층 프리미엄 라운지는 현대차의 고급 라인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래드 에르메스와 협업한 에쿠스 리무진, 제네시스 신형, 그랜저 하이브리드가 얌전히 서 있다. “에르메스와 2년간 진행한 이 에쿠스는 세계에 3대밖에 없습니다. 다른 1대는 현대자동차 계동사옥에 있고요. 주황색 에르메스 가죽으로 좌석을 만들었고 외부 색깔도 투톤으로 차별화했습니다.” 구루의 매끄러운 설명이 끝날 때쯤 서을호 건축가가 나타났다. 그와 함께 스튜디오를 둘러보며 질문을 시작했다. 공간 디자인 의도부터 물었다.

“새로운 개념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현대차가 소비자와 어떤 공감대를 이뤄야 하는가 묻고 대답하는 공간이랄까. 정답만 외우고 시키는 일만 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 ‘왜?’라고 묻게 하고 싶었죠.”

그가 생각한 것은 ‘0 to 0’. 무에서 왔다가 무로 돌아가는, 철에서 자동차를 만들고 자동차가 다시 고철로 재활용되는 순환의 세계. 가장 날것의 재료로 첨단 하이테크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건물 전체를 은색 파이프로 휘감고 그 흐름이 자동차에 이르면 마법 양탄자 느낌이 나도록 S자 형태의 푸른 강판을 사용했다. 전기선도 강관 속에 깔았기에 전기배관팀이 인테리어까지 맡았다. 안이 잘 보이도록 창문도 저철분 유리를 썼고 창문을 장식한 하얀 점도 자동차가 부각되도록 크기를 달리했다. 한마디로 디테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옆에서 “작업 인부들까지 매뉴얼이 있다”고 귀띔했다. 여기에 디자인 스튜디오 ‘2×4’, 서비스 디자인 컨설팅 업체 ‘엔진’ 등이 아이디어를 보탰다.

-왜 이렇게 세심하게 연출하나.
“소비자가 바뀌었다. 그 전에는 (배가 고파) 위로 먹었다. 그러다가 (맛있는 것을 찾아) 혀로 먹었다. 지금은 (건강 생각하며) 머리로 먹는다. 그만큼 발전했다.”

-1층에 자동차 대신 작품을 넣은 것도 그래서인가.
“프라임 사이트에 자동차 대신 작품을 설치하자고 했는데 오케이 사인이 났다. 라이프스타일의 중요성을 체감한 것이다. 하지만 그 디시전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브랜드커뮤니케이션팀과 영업팀이 그걸 이해했다는 뜻 아닌가. 이건 대단히 고무적이다. 사실 건축가가 혼자 건물 하나 지어놓는다고 뭐가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글로벌 기업과 일할 때는 여러 분야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큰 기업이 바뀌면 작은 기업도 바뀐다.”

-자동차는 왜 밑바닥이 보이도록 해놨나.
“디자이너도 자동차 잘 만들려고 고민했을 것 아닌가. 그 고민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도 신경 안 쓰는 밑바닥을 보여주면서 자신감을 표현하려고 했다. 건물 전체는 물론 계단 표시 같은 사인까지 다 세밀하게 디자인했다. 외관 조명도 여덟 가지나 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앞으로 6각 볼트 헤드의 각도까지 모두 똑같이 맞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7 5층 튜닝 매니어를 위한 공간
8 4층 어린이를 위한 휴식 공간 9 가지런한 파이프 라인 10 역동적인 파이프 라인 속에 전시된 자동차들
사람의 마인드를 디자인하는 서을호
가족을 위한 4층 매장은 집 모양의 파이프 인테리어 아래 어린이 코너가 눈에 띄었다. 자동차 놀이기구, 무독성 블록, 어린이용 책들이 꼬마 관객을 유혹하고 있었다. 카 매니어를 위한 5층은 스스로 차에 멋을 더하는 튜닝 공간. 세계자동차경주대회 WRC에 출전했던 레플리카도 만나 볼 수 있다.

그때 서 건축가가 인산염으로 처리해 중후해 보이는 강판 벽장문을 열었다. 판매용 팸플릿이 그 안에 그득 쌓여 있었다. 그런데 신기했다. 자동차 팸플릿이 갑자기 알록달록 요란스럽게 느껴졌다. 느낌을 말했더니 그도 공감했다.

“정말 그렇죠? 사람들도 이제 알게 된 거죠. 이렇게 만들면 이제 촌스럽다는 것을. 6층 사무실도 새롭게 꾸며놓고 나니까 정리를 다시 하기 시작했어요. 파일 규격도 새로 정하고. 영업 직원 양복도 매뉴얼이 생겼고요.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인드를 디자인하는 것입니다.”

그는 세월호 침몰 사고가 만들어낸 사회적 우울증도 모두 스스로를 바꾸는 기회로 삼자고 했다. “한국은 여러 문제가 많지만 누가 하나 바뀌면 또 드라마틱하게 모두 바뀝니다. 그게 우리 민족의 힘 같아요. 어려울수록 으쌰으쌰 해서 한 단계 끌어 올려야 해요. 한번 우등생의 맛을 보면 공부도 궤도에 오르잖아요. 이 단계를 뛰어넘기 위해 다같이 초심으로 돌아가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는 “고객에게서 배우는 게 정말 많다”고 했다. 특히 고객들이 바뀌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일본 건축가들이 왜 프리츠커상을 많이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일본 건축가들은 일본 기업들이 키워주거든요. 건축가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까지 어떤가요. 뭐 좀 괜찮다 싶으면 다 자기가 했다고 해요. 건축가는 아예 뒷전이죠. 그런데 이번에 그게 바뀌었더라고요. 스튜디오 개관식을 하면서 유공자 명단에 내(건축가) 이름을 넣고 불러서 연설도 한마디 시키더라고요. ‘이 사람이 한 건데 이 사람 이름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그때 생각했죠. 우리도 이렇게 바뀌고 있구나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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