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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 아베의 치밀한 계산

중앙일보 2014.05.17 02:44 종합 6면 지면보기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5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가 그려진 그래픽 패널을 놓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는 이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의 헌법 해석 변경을 공식화했다. [도쿄 로이터=뉴스1]


15일 도쿄에서 집단적 자위권 헌법 해석 변경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아베 총리 얼굴에 ‘독재자’라고 쓰인 포스터를 들고 있다. [도쿄 신화=뉴시스]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의 아이, 손자·손녀의 목숨을 지켜야 할 의무를 지닌 저와 일본 정부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의 아이 지켜야 할 정부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15일 오후 집단적 자위권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자청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그는 회견 30분 동안 네 차례나 ‘여러분의 어린이, 손자’를 언급했다.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란 걸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뿐 아니다. 아베는 이례적으로 그래픽 패널까지 사용했다. 한반도 유사시를 상정, 한국에서 일본 국민이 미국 군함을 타고 대피할 때 미 군함이 공격받을 경우를 묘사했다. 적(북한)이 미 군함을 공격할 경우 집단적 자위권이 없으면 일본 자위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베는 실무진이 만든 이 패널 그림을 퇴짜 놓았다. 배에 탄 어머니와 품 안에 안은 갓난아이, 그리고 어머니를 뒤에서 껴안고 있는 어린이가 너무 작게 그려졌다는 이유에서다. 아베는 최종적으로 패널 그림을 민간 디자인 회사에까지 의뢰했다. 결국 회견 당일 오전에야 ‘최종 OK’가 떨어진 이 그림에는 세 모자가 패널 한가운데 기이할 정도로 크게 그려졌다. TV아사히는 “아베는 측근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면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털어놓았다”고 전했다. ‘아베파’로 물갈이한 NHK가 35분 동안 이를 생중계했다.



 이날 회견까지의 일정 또한 치밀하게 계산됐다. 실무진은 총리의 사적 자문기구인 ‘안보법제간담회’가 15일 강경한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하면 그로부터 며칠 지난 뒤 ‘정부 견해’를 공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베는 이를 뒤집었다. ‘정부 견해’란 표현은 “집단적 자위권에 부정적인 연립여당(공명당)에 결례가 될 수 있다”며 ‘기본적 방향성’으로 수정했다. 또 “보고서 내용이 정부의 입장인 것처럼 비춰 반대 여론이 확산될 수 있다”며 당일 발표로 바꾸었다. 그러곤 회견에서 “‘유엔 다국적군에 자위대가 참가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간담회의 생각은 일 정부로서 수용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도쿄신문은 16일 “보고서의 일부를 거부한 것은 ‘눈가림’”이라고 지적했다. 어차피 현 시점에서 현실 가능성 없는 안을 보고서에 담게 한 뒤 그걸 자신이 거부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집단적 자위권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불식시켰다는 것이다. 신문은 또 “집단적 자위권과 직접 관련 없는 ‘그레이 존(gray zone)’ 문제를 보고서에 제기하도록 한 것도 공명당을 일단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술”이라고 지적했다.



당초 3월로 예정됐던 보고서 제출이 5월로 미뤄진 이유의 하나는 미국을 의식해서였다. 아베는 지난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방일 때 이 부분에 대한 찬성 입장을 얻어냈다. 이날 회견 직후 미국은 “일본 내부의 논의를 지지하고 환영한다”(국무부 마리 하프 부대변인)고 지지했다.



 아베는 또 16일 집단적 자위권의 헌법해석 주무 부처인 내각법제국의 고마쓰 이치로(小松一郞) 장관을 전격 교체했다. 명분은 “암 치료에 전념시킨다”는 것이지만 잇따른 고마쓰 장관의 돌발 언행을 지켜본 아베가 “문제의 소지를 사전에 제거할 필요가 있다”며 사실상 경질했다는 후문이다.



 일본 주요 언론사의 한 간부는 “만 59세의 아베가 이제껏 자민당을 주름잡은 그 어떤 원로 정치인보다 노회하고 주도면밀하게 집단적 자위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평가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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