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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 in 폴 매카트니' … 존과 폴, 동반자이자 라이벌

중앙일보 2014.05.17 02:12 종합 14면 지면보기
임진모
1980년대 이후 많은 음악 팬은 비틀스 하면 멤버 넷 가운데 먼저 존 레넌을 떠올린다. 이에 대해 폴 매카트니는 언젠가 “비틀스의 상징을 존 레넌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비틀스가 활동하던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며 살짝 섭섭함을 드러낸 적이 있다.


인기·음악성은 폴이 한 수 위

사실 비틀스가 세상을 뒤흔들던 60년대에 멤버 중 인기의 선두는 존 레넌이 아니라 엄연히 폴 매카트니였다. 예쁜 얼굴 때문은 아니었다. 비틀스의 대표곡인 ‘예스터데이’ ‘오블라디 오블라다’ ‘헤이 주드’ ‘렛 잇 비’는 모두 폴이 작곡했다. 그는 탁월한 작곡 역량으로 끝없이 비틀스의 예술적 영토를 확대해 갔다. 비틀스의 역사적 과업으로 평가받는 ‘발표하는 앨범마다의 혁신’도 폴이 주도했다.



20세기 포퓰러뮤직의 절대 명반으로 손꼽히는 비틀스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와 ‘애비 로드’를 만들 때 지휘 통솔한 인물은 명백히 폴이었다. 심지어 비틀스 해산 후인 70년대도 그는 인기와 영향력 측면에서 최고였다. 비틀스 이후 폴은 빌보드 차트 1위곡이 9곡이나 되지만 존은 2곡에 불과했다. 비틀스가 그룹이었기에 그는 네 멤버가 흩어진 뒤 유일하게 밴드 ‘윙스’를 이끌면서 대중에게 비틀스에 대한 공백을 메우려고 애썼다.



하지만 80년 12월, 존 레넌이 사망하면서 대중이 인식하는 비틀스의 대표성은 존으로 넘어갔다. 비틀스 때에 폴과 존은 사상 최고의 콤비로 통할 만큼 환상의 동반자였지만 동시에 치열한 라이벌이었다. 비틀스 말기 존이 결혼하면서 결혼식 장소와 날짜를 두고 폴의 연애 스케줄을 신경 썼을 정도였으니까. 갈라선 이후에 그 경쟁은 한때 험악한 갈등 상황을 빚기도 했다. 존은 대놓고 ‘하우 두 유 슬리프’란 노래에서 폴의 곡은 엘리베이터에서 흘러나오는 심심한 음악이라고 조롱했고, 폴은 “존의 음악은 내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일갈했다. 음악적인 면에서 볼 때 존의 중심이 ‘자기’였다면 폴은 언제나 ‘대중’ 중심적 접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둘은 달랐다. 록의 역사는 존을 비교우위에 놓지만 오늘날 대중이 더 많이 기억하는 비틀스의 신화적 예술은 폴이 아니면 구축되지 못했을 것이다. 비틀스 초창기에 존 레넌이 작곡을 하게 된 연유 또한 능란하게 곡을 써내는 폴에게 자극받아서였다.



멜로디와 화성을 중시하는 작곡자와 편곡자는 지금도 폴을 위로 본다. 비틀스가 확립한 지고의 대중성과 음악성은 폴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폴의 내한은 폴이 오는 것만이 아니라 비틀스가 오는 것이기도 하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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