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 마음의 명문장 <15>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중앙일보 2014.05.17 01:56 종합 20면 지면보기
한형조 교수는 청계산 자락에 자리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연을 복이라 여긴다. 동쪽 연못가에 앉아 봄볕을 맞던 한 교수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탁한 물에는 발을 씻는다”며 신발을 벗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너는 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 설 명절을 쇠고 올라온 날, 아들을 불러 앉히고 이리 말했다. “그날, 혹 생각나면 애비 원망이나 욕을 해도 좋고, 짝꿍이랑 공연이나 영화를 보러 가도 좋다. 아니, 영 모르고 지나가는 게 기중 낫겠구먼.”


솔개는 하늘서 날고, 물고기는 연못서 뛴다

 딴에는 선심을 크게 썼다 싶었는데 아들의 반응이 맹랑했다. “제가 언제 제사 지내 드린다고 했나요?”



의례에 관한 한 나는 유교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제사상 차리는 법도 모르고 연로한 노모는 아직도 내 입성을 타박한다. 그런데도 꽤 오래 유교를 붙들고 있으니 신기해 할 사람이 많겠다. ‘티베트에는 승려 수만큼의 불교가 있다’는 격언이 내가 보는 엉뚱한(?) 유교를 변명해 줄지 모르겠다.



유교에 대한 세 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는 유교가 중국의 장물이라는 것. 홍대용은 지구의를 돌리며 “어디가 중국(中國)인고? 가운데가 아닌 나라가 없구먼…”이라고 중얼거렸고, 다산 정약용은 ‘문명’이란 휴머니티[仁]가 살아 있는 질서를 가리킬 뿐 인종이나 지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고 역설했다.



 둘째는 문중이나 유림이 유교의 현장이라는 생각이다. 성물 숭배가 종교를 대신할 수 없고, 전기를 읽는 것과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눈앞에 댄 물건을 못 보듯이, 유교 또한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 실체가 그만 아득해지고 만다.



 어느 사회학자가 농담을 섞어 말했다. “유교는 벌써 미국으로 건너갔다.” 입양 마인드가 더 살아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니 오해 없기를.



셋째로 결정적인 오해가 있다. 유교를 도덕적 설교로 읽는 통념이다. 주자의 ‘백록동규(白鹿洞規)’는 규율과 강제를 마지못한 최후의 수단으로 협박했다. 잊지 말자. 유교는 미학 위에 서 있다. 그동안 가령 『논어』부터 잘못 읽어오지 않았을까. 수많은 격언은 “~ 해야 한다”가 아니라 “나는 이러이러하다”는 공자의 독백 혹은 서술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도산서당은 퇴계의 미학이 서린 상징적 공간이다. 주차장을 지나 초입에 들어서면 시냇가 쪽에 대(臺)가 하나 서 있다.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혹은 천운대(天雲臺)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하늘빛 구름 그림자라니, 이게 무슨 소릴까. 단서는 선배인 주자가 쓴 시에 담겨 있다.



 ‘반 이랑 네모진 연못이 거울처럼 열려 있어,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어울려 오가네. 묻노니. 그대 어찌 그리 맑을 수 있는가. 아득한 샘에서 싱싱한 물이 솟아 오기 때문이지(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선비들은 연못을 네모나게 팠다. 네모진(?) 마음[方寸]을 빗대어 그렇게 만들었다. 마음은 야망과 분노로 들끓고, 상처와 불안으로 혼탁하다. 그 속에서 대상은 보이지 않고, 앞에 선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흡사 시냇물이 요동치거나 물빛이 탁하면 하늘빛 구름 그림자를 온전히 비추지 못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 사이를 뚫고 언제나 싱싱한 샘물이 솟음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언제쯤 하늘빛 구름 그림자가 온전히 비칠까나.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다. 김연아 선수처럼 집중력과 수많은 엉덩방아를 거치면서 기량은 조금씩 자라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뭐, 없던 것이 생기거나 가져다 보탠 것은 없다. 다만 덜어낼 뿐! 무엇을?



 『대학(大學)』의 ‘정심(正心)’ 장은 말한다. ‘네 마음속에 분노가 있으면, 그리고 공포·애착 혹은 걱정이 있으면 마음은 평정(正)을 얻지 못한다. 거기에 사로잡히면 도무지 보아도 보일 리 없고, 듣고도 들릴 리 없으며, 음식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른다!’



유교는 마음의 훈련에 집중한다. 밖으로 외부의 스크래치를 막고, 안으로는 오래된 나르시스적 고착을 깨고자 한다. 이 안팎의 동시 공략을 심학(心學)이라 한다. 서양의 번역어인 심리학이 들어오면서 ‘마음의 계발’을 노리던 이 학문이 까마득하게 사라졌다.



 퇴계가 도산에 퇴거한 이유는 이 오래된 지식과 기술[古學]을 익히기 위한 것이었다. ‘몸이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에 맞는데, 공부가 뒤처졌으니 늘그막이 걱정이네(身退安愚分, 學退憂暮境).’



유교 인문은 정신의 완고(頑固)를 부수고 마비를 풀어 본래의 유연한 반응(感應)을 이끌어내려는 기획이다. 여기 외적 강제도, 천상의 보상도 없다. 다만 자신의 본래 힘과 빛을 되찾았을 뿐이다. 그것은 흡사 바람이 불면 숲이 울고, 봄이 되면 꽃이 피는 것을 닮았다. 퇴계가 그 흥을 이기지 못해 읊은 노래가 있다.



 ‘춘풍(春風)에 화만산(花萬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萬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 사롬과 한가지라. 하말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늬 그지 이슬고’(‘도산십이곡’ 중 5). 인간이 곧 자연이 되는 이 기획을 왈,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 부른다. 들으면 다들 깜짝 놀라지만.



발걸음이 도산서당을 지나치면 곧 천연대(天淵臺)와 만난다. 눈여겨보시기 바란다. 어약연비(魚躍鳶飛)라,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 나날이 샘솟는 활수(活水)의 생명력으로 일상의 삶을 최고도로 영위하는 것, 이것이 모두가 바라는 꿈이 아닐는지.



유교는 삶의 길(ars vitae)을 찾아 나선 구도의 모험이다. 그래서 왈, 도학(道學)이라 부른다. 풍요의 한가운데서도 기쁨은 없고, 사욕에 유폐되어 타인과 절연한 비극의 삶을 이대로 끌고 갈 것인가. 너무 늦기 전에 이 오래된 학문[古學]에 뛰어들라 하면 시대착오라 하겠지. 서양의 어느 현자가 말했다. ‘진리는 오래된 것이다. 다만 오류만이 새롭다’.



퇴계의 성취를 보여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서당 앞을 누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당을 쓸던 노복이 불같이 화를 냈다. “아니, 선생님 앞에서 인사도 없고 말에서 내리지도 않다니.” 책을 읽고 있던 퇴계가 웃으면서 타일렀다. “좋은 풍경 하나를 보탰을 뿐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느냐?”



주자학이 ‘삶의 기술’



한형조 교수는 대학 초년 때 잠깐 산에서 지낸 적이 있다. 불교가 가르치는 무의미의 기술에 지금도 혹하는 이유다. 대학 졸업 무렵부터 사회적 관계와 책임을 묻는 유학 공부를 시작해 주자학에 납치 혹은 중독됐다. 주자학이 과연 지금도 여전히 ‘삶의 기술’로 유효한가를 화두 삼아 시공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펼치기를 즐긴다. 1958년 동해안 바닷가인 경북 영덕군 강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 『조선 유학의 거장들』 『왜 동양철학인가』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등이 있다.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