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남자가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때

중앙일보 2014.05.17 01:06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형경
소설가
예전에 군복무를 마친 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배가 농담처럼 하던 말이 있다. “지난 3년간 내가 선배도 지켜줬어.” 업무에 도움이 필요할 때,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싱긋 웃으며 말하곤 했다. 그는 농담이었지만 나는 그 말에 우리 시대와 남녀 관계를 가로지르는 진실이 있다고 느끼곤 했다. 국방의 의무는 왜 남자에게만 있는 걸까, 여자들은 국민의 기본 의무에 대해 인식할 기회가 없구나, 그와 같은 기회 박탈이 여성의 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구나 등등.



 여자는 남자가 하는 어떤 일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속으로 뛰어들어 문제를 해결하는 이는 남자여야 한다고 믿는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고,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내놓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 게 남자의 몫이라 믿는다. 까마득한 옛적부터 남자는 원래 그런 일을 했다고. 때로는 남자 쪽에서 그 신화를 재생산한다. 자기와 결혼하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주겠다고. 물론 요즈음 젊은이들은 낡은 신화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들었다.



 반면 남자들은 인정받는 일에 약하다. 자기를 인정해주는 보스를 위해 서슴없이 목숨을 내놓고, 찬사를 듣고 싶어 우스꽝스러운 생색내기도 마다 않는다. 남자들의 내면에는 혹시 인정과 감사에 굶주린 유전자가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까마득한 옛적부터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해오면서도 그것을 당연시할 뿐 칭찬과 지지를 받아본 적 없는 경험이 그들 내면에 축적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런 눈으로 보면 개선문은 인정과 찬사 욕구가 멋지게 구현된 건축물임에 틀림없다.



 여자의 집안일이 온전한 노동으로 분류되고 돈으로 가치 매겨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변화를 꾀할 때 여성들이 원한 것은 자신들의 노동을 당연시하거나 하찮은 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감사의 마음도 가져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이야기가 남성들의 노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으며, 가족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있지 않느냐고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남자들은 진심 어린 감사의 언어를 들을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인정과 지지에 약한 존재가 되어 나쁜 의도를 품은 사람들에게 어처구니없이 조종당하기도 한다. 오늘도 한 가닥 산소줄에 의지한 채 위험한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남자들이 있다. 그들의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김형경 소설가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