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에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를 만났습니다. 세월호 이야기를 하다가 영국인의 운전매너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목사는 “그게 다가 아니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스위스에 3년간 머문 적이 있습니다. “큰 도로에서 신호등이 빨간불인데 브레이크를 안 밟고 선을 넘어갔다. 신호가 완전히 바뀌기 전에 일찍 출발했다. 속도를 위반했다. 도처에 카메라가 깔려 있다. 그때마다 무시무시한 범칙금이 날아온다. 당시 제일 싼 범칙금이 20만원 정도였다. 제한 속도가 시속 40㎞인 주택가에서 시속 60㎞로 달리다 카메라에 찍힌 사람이 있었다. 그는 총 100만원을 내고 1개월 운전면허 정지를 당하더라.”

고개가 갸우뚱해지더군요. 그건 지나치게 엄격한 ‘규제와 율법의 사회’가 아닐까. 이어지는 이 목사의 설명에 저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더라.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아니라 딱 한 사람 말이다. 그 하나의 생명을 전부처럼 여기더라.”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말입니다. 적지에 있는 일병 하나 구하려고 많은 군인이 투입되고, 그들 중 많은 이가 죽었습니다. 아무리 손가락을 꼽으며 더하기·빼기를 해봐도 답이 안 나왔습니다. ‘하나 구하려고 여럿이 죽었는데, 그게 뭐야? 결국 손해잖아.’ 그게 저의 셈법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대한민국의 셈법일 겁니다.
생각해 봅니다. 만약 30만원, 50만원, 100만원짜리 주차위반 스티커를 받으면 기분이 어떨까. 속이 뒤집어질 겁니다. 5만원짜리 스티커가 날아와도 마음이 그렇게 쓰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인과 영국인, 또 다른 유럽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기에는 ‘하나의 생명’을 지키자는 공감대가 있는 겁니다. 그 ‘하나의 생명’이 뭐냐고요? 바로 나의 생명이자 너의 생명입니다. 내 자식의 생명, 가족의 생명, 이웃의 생명, 모두의 생명입니다. 그걸 지키기 위해, 그걸 존중하기 위해, 그걸 살리기 위해 30만원짜리, 50만원짜리 스티커를 받아들인 겁니다. 그들은 아무도 없는 주택가 골목에서 시속 60㎞로 달린 차를 ‘살인 행위’라고 봤으니까요.
이 목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자문했습니다. ‘좁쌀 하나에 수미산이 들어간다. 하나의 생명을 지킬 때 모든 생명이 지켜진다. 국가는 그럴 때 개조된다.’ 나도 몰랐던 나의 살인 행위. 그걸 고치기 위해 우리는 얼마짜리 스티커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