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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참 나쁜 기름

중앙일보 2014.05.09 00:37 경제 2면 지면보기


대구시 수성구의 A 주유소. 지난해 초부터 길 건너편 주유소와 ‘경쟁’이 붙었다. 고민하던 주유소 사장은 “기름을 끓여 부피를 늘려 팔면 어떻겠느냐”는 ‘기계 업자’의 말에 넘어갔다.

전국 불량주유소 118곳
경쟁 심한 경기 35곳 적발 최다
74%는 등유 섞는 등 가짜 팔아
보일러로 기름 데워 부피 늘리기도
주유소 난립하면서 불법 속출



 주유소 한 켠에 보일러를 설치하고 경유를 80도로 ‘끓이다시피’했다. 별도 관을 통해 저장탱크에 데운 기름을 이동시켰다가 손님이 올 때마다 기름을 팔았다. 경유 온도가 1도 올라가면 부피가 0.08% 늘어난다는 데 착안한 눈속임 영업이었다. 이 주유소 사장은 올 1월과 2월 손님들에게 기름 양을 속여 두 달간 1500만원의 이득을 올렸다.



 주유소 간 경쟁이 심화하면서 불량 주유소들의 진화하는 비양심 영업이 눈총을 받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에서 운영하는 ‘오피넷’에 따르면 4월 말 기준 불량 주유소로 적발된 곳은 총 118곳에 달했다. 단속에 걸린 이들 주유소의 70.33%가 가짜 석유를 팔고 있었다. 현행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사업법에 따르면 휘발유에 ‘시너’와 같은 다른 석유제품을 섞거나 경유에 등유나 선박용 경유를 혼합한 것을 모두 ‘가짜 석유’로 판단한다.



 자동차에 주유해선 안 되는 등유를 주입하는 등 용도 외 목적으로 기름을 팔다 걸린 곳(17.79%)에 이어 정량 미달 판매(8.47%)도 상당했다.



 한국석유공사 관계자는 “2012년 267개가 적발되고 지난해 단속에 걸린 불량 업체는 311개로 다소 늘어난 추세”라며 “정부가 ‘값싼 기름’을 위해 지원하는 알뜰 주유소도 총 6곳이 단속돼 영업이 취소됐다”고 설명했다.





 불량 주유소가 가장 많이 적발된 곳은 경기 지역(35곳)이었다. 다음으로는 경북(16곳)-충남(11곳)-충북(10곳)-전남(9곳) 순으로 단속 건수가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 지역에서 단속에 걸린 주유소의 74%는 가짜 석유를 팔았다. 기름 양을 속이다 걸린 주유소도 20%에 달했다. 실제로 용인의 한 셀프 주유소는 지난 1월 12대의 주유기 중 1대의 주유기를 조작했다. 통상 20L를 주유해 150mL 정도 적거나 많으면 ‘비양심’ 주유소로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주유소는 190mL가 덜 나오도록 해 단속 대상이 됐다. 정유업체 관계자는 “과거에는 기름값이 비싸다는 점을 악용해 가짜 석유를 팔아 이윤을 남겼다면 최근 들어선 주유소 간 경쟁이 심화하면서 비양심 영업을 하는 주유소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전했다.



 수법은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세녹스’와 같은 가짜 휘발유를 판매하다 최근 들어선 경유에 등유를 섞어 파는 곳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섞는 비율도 제각각으로 5%에서 최대 55%까지 다양했다. 2005년엔 리모컨 조작 방식으로 진짜 기름을 주유하다 중간에 손님 몰래 리모컨을 눌러 ‘가짜’를 주입하는 주유소들이 단속에 속속 걸렸다. 리모컨이 담뱃갑 절반 크기여서 손님들이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점을 악용했다. 2008년 충북 음성의 한 주유소는 아예 이중 탱크를 만들고 별도의 밸브+리모컨까지 조합해 영업을 하다 걸렸다. 가짜 석유를 손님 몰래 넣기 위해 2009년 김포의 한 주유소는 리모컨을 전자계산기처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정부가 가짜 석유 구분을 위해 시약에 넣으면 ‘보라색’으로 변하는 식별제를 넣자 특수 필터로 이 식별제를 걸러내 판매한 곳도 나타났다. 경기도 화성의 한 주유소는 탱크로리를 이용해 기름을 필터로 걸러 식별제를 없애 780억원어치의 가짜 경유를 팔기도 했다. 한국석유관리원 이혜진 대리는 “단속반이 20L를 기준으로 측정한다는 점을 악용해 미터기를 조작해 20L까지는 정량이 나오도록 하고 이후부터는 미터기 표시보다 3~5% 적게 주유되게 하거나 기름을 끓여 부피를 늘려 파는 곳도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불량 주유소가 끊이지 않는 것은 주유소 돈벌이가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주유소 주인은 동네 유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폐업한 주유소는 310곳에 이른다. 2008년(101곳)의 3배에 이르는 규모로, 5년 연속 폐업 주유소가 늘어나고 있는 상태다. 지난해 폐업 주유소가 가장 많은 지역은 경기도(41곳)였다. 불량 주유소가 경기도에 상대적으로 많은 것도 이런 경영난의 반영이란 지적이다. 사업을 접지는 못하지만 일단 문을 닫고 상황을 보는 휴업 주유소도 지난해 말 전국 393곳에 이른다. 한국주유소협회 관계자는 “3년 전 1.5% 수준이던 주유소 마진이 지금은 0.4% 수준까지 낮아졌다”며 “2700개 주유소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연간 영업이익이 3800만원으로 대졸 직장인 초임 수준이었다”고 주장했다. 주유소 경영난 악화의 이유는 주유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전국 주유소는 1만3000여 개가 넘는다. 업계에선 7000~8000개가 적정 규모라고 분석한다. 이와 함께 알뜰 주유소가 늘면서 주유소들이 과거처럼 가격을 높이기 어려운 구조가 된 점도 경영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정유회사들도 자체적으로 불량 주유소 단속에 나서고 있다. SK에너지는 매달 전국 주유소 4000곳 중 약 1000여 곳을 불시에 점검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평소 판매량 대비 본사에 주문하는 물량이 적은 경우, 가격이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저렴한 경우를 선별해 손님으로 위장해 검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GS칼텍스는 “가짜 석유를 판매하다 적발되면 즉시 ‘폴’을 회수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지만 자체 단속이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가짜 석유를 사용하면 엔진이 망가져 주행 중 차량이 갑자기 멈춰 서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한국석유관리원은 “가짜 휘발유를 넣은 차량 실험을 통해 실제로 엔진 부품이 손상돼 시동이 꺼지는 현상을 확인했다”며 “평상시 자기 차량의 연비를 체크하고 기름을 넣을 때는 ‘리터(L)’ 단위로 주문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김현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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