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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의 시시각각] 이번에도 '망각의 나라' 될까

중앙일보 2014.05.09 00:29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규연
논설위원
세월호 참사 24일째. 곳곳에서 분노의 장이 벌어진다. 분노는 낡고 썩은 존재를 도려내는 출발점이다. 하지만 분노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지난 숱한 재난을 돌이켜 생각해보자. 정치권과 언론은 분노에 찬 말과 글을 쏟아내다가 두세 달 지나면 거론조차 안 한다. 분노는 길고 반성은 짧다. 특히 백서 문화는 집단분노가 집단망각으로 홱 바뀌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1994년 발간된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백서를 본다. 겉표지 부제부터 수상하다. ‘우리는 그 참사, 이렇게 극복했다’. 백서라면 ‘사고원인과 대응’ 정도이어야 정상 아닌가. 분량도 부록을 빼면 150쪽 정도로 얄팍하다. 목차는 부제보다 더 요란하다. 제2장 혼신의 구조활동, 제4장 하나로 뭉친 도민의지, 제5장 해 뜨는 우리 위도….



 백서(白書)라는 말은 영국 정부가 국민에게 알리는 정책보고서의 겉표지가 흰색인 데서 유래됐다. 사고백서는 원인을 찾아내 자세히 기록해놓음으로써 비슷한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만드는 공적 보고서라고 하겠다. 그런데 292명을 수장시킨 서해훼리호의 백서는 ‘자랑스러운 극복기’였다. 이 백서를 들여다본 것은 두 번째다. 처음 본 것은 2008년 2월이었다.



삼풍 붕괴사고(앞)와 미국 컬럼비아호 폭발사고의 백서 비교. [신인섭 기자]
 숭례문 방화사건을 계기로 사고백서 실태를 탐사해보기로 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일어난 20개 대형 재난을 검증 대상에 올려놓았다. 취재는 초동 단계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재난백서를 모아둔 기관이 한 곳도 없었다. 백사장에서 유리조각 찾는 심정으로 쫓아다니며 한두 권씩 모았다. 취재가 마무리되면서 대한민국의 한심한 민낯이 드러났다. 재난 20건 중 12건은 백서가 아예 없었다. 8권을 모아 방재 전문가들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제외하고 6권은 백서로 보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왔다. 서해훼리호 백서의 평점이 가장 낮았다. 21년 뒤 닮은꼴의 세월호 참사는 이때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후 백서 문화는 좀 나아졌을까. 수도권 대학 교수인 방재 전문가의 말이다. “숭례문 백서는 그런 대로 잘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나아진 게 없다. 백서 발간은 여전히 의무사항이 아니다. 큰 재난이 일어나도 사회가 지속적인 관심을 갖지 않으면 발간하지 않는다. 숭례문 방화 몇 달 뒤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큰 화재가 났지만 백서 없이 지나갔다.”



 정부가 대책 마련을 서두르는 모습이다. 이번만은 길고 진한 반성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민간·국회 중심으로 거국적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기 바란다. 몇 년이 걸려도 좋다. 참사의 문제점·원인을 이 잡듯이 잡아내 꼼꼼한 대책을 수립하자. 부패하고 무능한 기업·관료가 꼼짝 못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자.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여야 모두가 힘을 합쳐 2년여 동안 200만 쪽 이상의 백서를 작성했다.



 5년 전 취재 당시, 2003년 미국 컬럼비아호 사고백서를 인터넷에서 찾아냈다. 지구로 귀환하던 우주왕복선이 폭발해 우주인 7명이 희생된 사건의 기록이었다. 모두 6권 3000여 쪽 분량이었다. 그 옆에 역대 최대 인명피해(사망 502명)를 낸 삼풍백화점 백서를 놓고 사진을 찍었다 . 300여 쪽, 그나마 가장 잘 만들었다는 국내 백서가 이 정도다. 집단반성과 집단망각, 대한민국은 또 기로에 서 있다.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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