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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지지 않고도 웃기는 꽃할배들

중앙선데이 2014.05.03 02:43 373호 24면 지면보기
로버트 드니로(69), 마이클 더글러스(68), 모건 프리먼(77), 케빈 클라인(67). 네 배우의 이름이 더없이 친숙하게 들리는가. 물론 넷 모두 오스카 트로피를 한 번씩은 거머쥔 쟁쟁한 대배우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전성기는 적어도 25~30년 전이다. 당신이 이들을 오랜 친구처럼 느꼈다면 당신의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뜻이다. 슬프게도 그들은 이제 늙었고, 당신도 나이를 먹었다.

영화 ‘라스트 베가스’

일흔 줄에 들어선 왕년의 노배우들이 초등학교 동창으로 나와 오랜만에 넷이 모여 여행을 떠난다. 노인 친구들이 모이면 흔히 그렇듯 누구는 몸이 아프고 누구는 마음이 병들어 있고 누구는 여전히 팔팔하게 젊은 척을 하지만 아직도 철이 안 들어 젊은 여자랑 결혼할 생각만 한다. 결국 마이클 더글러스가 서른 살쯤 어린 여자와 첫 장가를 간다고 고향 친구들을 부른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총각파티를 하겠다는 것이다. 들뜨는 건 젊으나 늙으나 매한가지지만, 친구에게 오는 전화라고는 ‘암 걸렸다’나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대부분인 이들에게 라스베이거스 여행은 아마도 ‘라스트 베가스’가 될 확률이 더 많다.

나이 든 친구들은 늘 보고 싶고 그립지만 만나면 또 불편하다. 오랜 시간만큼 오래 묵은 미움이 있고 벗어나지 못하는 성질머리들이 있다. 마이클 더글러스는 여전히 잘 차려 입는 비즈니스맨이지만 절친 로버트 드니로의 아내 장례식 때 가지 않았고, 그 서운함을 버리지 못하는 드니로는 ‘잠바때기’를 걸친 괄괄한 노인네로 친구에게 사사건건 증오를 드러낸다. 네 명의 배우들은 자신들이 쌓아왔던 캐릭터들을 약간의 힘만 빼고 그대로 가져와서 잘 발효된 음식 맛을 보는 듯한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안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거물 마피아 두목의 흉내를 낼 때나, 케빈 클라인이 특유의 표정 연기를 펼칠 때나, 마이클 더글러스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거들먹거릴 때, 검버섯 핀 모건 프리먼이 철없는 젊은이에게 예쁜 여자에게 거절당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 현명한 지혜 한마디를 던지는 모든 것들이 참으로 익숙해서 편안하다.

한국 사람이라면 손쉽게 ‘꽃보다 할배’를 떠올리겠고 할리우드 영화팬이라면 같은 라스베이거스를 무대로 한 질펀한 술판 영화 ‘행오버’의 노인 버전이라고 생각할 게다. 어쨌든 다큐멘터리인 꽃할배와 비교하자면 이 영화는 여행지에서 풍만한 여자들의 비키니 대회와 질펀한 술파티가 열리며, 케빈 클라인은 아내에게 콘돔을 여행 선물로 받아들고 들뜬 상태라 훨씬 더 세속적이다. 그러나 ‘행오버’만큼 난잡한 일을 벌일 만한 체력과 과감한 영혼이 사그라지는 나이인지라 그것보다는 훨씬 보수적이고 위험한 수위를 절대 넘지 않는다.

이야기의 중심동력은 이곳에서 가수라는 제2의 인생을 꿈꾸는 메리 스틴버겐을 놓고 마이클 더글러스와 로버트 드니로가 잠깐 벌이는 삼각 관계인데, 이 여자 역시 60대다. 30~40대의 아름다운 여자가 늙은 남자의 의외의 매력에 반해서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서 그들이 서로의 상처를 읽어주고 숨은 매력을 찾아내고 주름 가득한 얼굴로 키스를 나누고 하는 것들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어 보인다.

아카데미 수상자 배우들이 모여서 앙상블 연기를 펼친다고 해서 아카데미 수상작급의 깊이 있는 작품을 기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노인들이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 모여서 해프닝을 벌인다는 줄거리에 ‘안 봐도 뻔하다’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이라면 그런 예상보다는 훨씬 더 볼만하다고 말하고 싶다. ‘내셔널 트레저’ ‘당신이 잠든 사이에’ ‘쿨러닝’ 등을 연출한 감독 존 터틀타웁의 ‘라스트 베가스’는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순간의 웃음을 놓치지 않는 개그의 배치와, 재치 있는 대사 한 줄씩들이 예상 가능한 웃음과 감동의 안전망 사이사이에서도 진부하지만은 않은 수준을 드러낸다. 파티는 충분히 흥겹고, 나도 한 번쯤 새 옷을 사입고 멋진 파티에 한번 가보고 싶구나 싶을 정도로 몰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회한에 찡하게 공감하는 순간도 분명 있다. 늙은 배우들은 이제 아주 우스꽝스러워지거나 괴팍한 캐릭터로 변하지 않으면 코미디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배우들의 위엄과 과거의 영광을 내팽개치지 않아도 충분히 가볍고 유쾌한 코미디가 가능하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해준다. 분명 일급 셰프의 고급 레스토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늘 가면 일정한 수준의 음식을 맛볼 수 있어 찾아가는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서 그날따라 적당히 잘 구워진 스테이크를 맛보는 즐거움이 있는 영화다. 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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