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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적성국

중앙일보 1977.03.19 00:00 종합 1면 지면보기
「카터」는 기어이「전 적성국」이란 용어로 그 동안의 안개 속에서 벗어 나왔다. 미국무성 대변인은 「유엔」연설에서「카터」가『아시아」의「전 적성국」이라고 말한 것은 북괴「캄보디아」「베트남」을 지칭한 것이라고 분명한 주석까지 달았다.

어감으로 보아「전」자가 붙은 것은 벌써 과거를 뜻한다. 미국과 북괴의 사이는 어느새 통거의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카터」가 사용한「포머·애드버서리」(former adversary) 라는 말 자체도 한결 부드러운 단어다. 바로 지난해의 판문점 도끼 살인에서의 그 적대감이라면 당연히「에니미」(enemy)라고 해야 옳다. 「애드버서리」란 말은 원래 정치협상에서의 상대방, 운동경기에서의 상대를 지칭할 때 쓴다.

「에니미」란 말은 그 어원을 보면「친구가 아니다」는 뜻을 갖고 있다. 「애드버서리」의 어원은 뜻밖에도「의지한다」「함께 일하다」의 뜻을 같고 있다.

「카터」의「전 적성국」이란 표현은 어딘지 긴 여운과 미묘한 감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북괴 측의 끈질긴 추파가 은밀히 있었던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판문점에서 도끼를 휘둘러 미국병사를 살해한 북괴가 미국 고위층에 협상하는 듯한「제스처」를 보여주었던 일,「파키스탄」「부토」대통령을 징검다리로「카터」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던 일들은 일연의 움직임으로 짚어 볼 수도 있다.

미국은 공식발언을 통해 몇 차례를 거듭해 한국의 등뒤에서 북괴와 접촉하거나 마주앉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조치들은 그런 확언이나 약속과는 본질에 있어서 어떻게 구별되는지 궁금하다. 미국과 북괴가 적대관계가 아니란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이해와는 상중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카터」의 용어들은 마치 무슨「퍼즐」같기도 하다. 따로따로 떼어놓으면 별난 뜻이 아닌 것 같지만, 「퍼즐」처럼 그것들을 하나 둘씩 맞추어 놓으면 심상치 않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주는 그런 무모한 실용의「모럴」은 결코 아닐 것 같다.

어쩌면 상대를 무마하고 쓰다듬으면서 그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이단적인 공산 집단이다. 미국은 그들을 시험해 보지 않고도 그들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구 못지 않게 미국을 괴롭힌 것이 바로 북괴였으니 말이다. 얻을 것도 없는「게임」에 미국은 공언한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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