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의 잔소리, 왜 아이 성적을 떨어뜨리나
좋은 성적을 위한 세요소를 뽑는다면 우선 공부에 대한 동기입니다.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문제”라는 게 바로 동기 문제입니다. 공부가 재미없으면 아무리 머리 좋아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공부의 기술입니다. 효과적으로 지식을 이해하고 종합해서 기억한 후 시험의 요구 사항에 따라 끄집어내서 정답을 만들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시험을 잘 보기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그런데 준비를 철저히 했는데 시험 당일 실력 발휘를 못 한다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습니다, 준비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준비 단계에서는 누가 봐도 1등인데 시험을 망치는 학생도 꽤 있습니다. 만약 후자라면 시험불안이 심한 게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 학생이 시험 불안을 경험합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학생 25~40%가 시험 불안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적절한 불안은 오히려 수행 능력을 향상 시키지만 과도하면 수행 능력을 저하시켜 성적을 하락시킬 뿐 아니라 건강한 심리 발달에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시험 불안은 보통 네종류 증상이 있습니다. 우선 생리학적 각성입니다. 두통과 속쓰림, 구토, 설사, 과도한 땀 흘림, 짧은 호흡, 어지러움, 빠른 심장 박동, 그리고 입 마름 증상 등입니다. 심하면 숨이 멈을 것 같은 공황 증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수학 문제를 다 못풀면 어떡하지, 앞 자리 학생이 내는 소리가 신경 쓰여 시험을 망치면 어떻게하지, 등과 같은 부정적 생각이 끝도 없이 머리를 맴돕니다.
그리고 인지와 행동의 문제가 일어납니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회피 행동이 나타나 공부를 충분히 했음에도 빈 시험지를 내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여기에 자존감 저하, 우울, 분노, 그리고 절망 같은 정서적 반응이 이어집니다.
시험불안이 시험 수행 능력을 떨어뜨리는 이유를 자세히 한 번 알아보죠. 작업 기억(working memory)과 연관해 설명해 보겠습니니다. 작업 기억은 컴퓨터 클립보드처럼 당장 업무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보관하는 걸 말합니다. 정보를 일시적으로 담는 것 외에 업무 수행 순서를 결정하고 실제 업무를 수행하는 뇌의 각기 다른 여러 시스템의 조율 업무까지 담당합니다.
그런데 시험 불안이 과도하면 작업 기억은 두 배로 업무량이 늘어납니다. 한 편에선 열심히 시험 문제를 풀면서, 다른 한 편에선 시험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부적절한 걱정을 계속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작업 기억 용량엔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시험 불안이 커질수록 시험 문제 푸는 데 필요한 자원의 양이 줄어드는 결과가 생기는 거죠. 시험 불안이 큰 자녀에게 집중하라고 야단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불안해서 집중력이 떨어졌는데 야단을 치면 불안이 늘어 작업 기억의 효율성만 더 떨어뜨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로서 자녀의 시험 불안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우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전해 줘야 합니다. 말로만 과정이 중요하다고 하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녀의 마음을 바꾸려면 부모의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부모 인생관도 재조정해야 하는 간단치 않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라”는 말 대신 “인생 별 것 없다, 대충 살아라”고 이야기할 부모는 없을 텐데요. 실제로는 인생 별 것 없다는 식의 염세적 사고에 젖는 게 불안감을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불안이란 성취의 욕구인 동시에 성취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생 별 것 없어, 란 생각은 삶의 목표를 낮추는 효과를 가져와 불안감을 낮춰줄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작업 기억이 공부에 할당하는 부분을 늘려 성적을 올리게 합니다. 거꾸로 성취 위주의 원하는 결과를 얻어도 더 큰 다음 목표를 재설정하기에 불안감이 끝없이 증폭하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자녀에게 “인생 별 것 없다, 막 살아라”고 할 수는 없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는 부모가 많을 텐데요. 맞습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염세주의 이야기를 한 것이고요. 현실 속에선 인생관을 재조정해 불안을 해소하는 전략을 권합니다. 성취 위주의 인생관을 가치 중심의 인생관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등수만이 아닌 다른 가치에 삶의 목표를 두는 것이죠. 이건 인생이 허무하니 되는 대로 막 살라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가치 중심의 삶으로 재조정하면 성적 올리려고 멀리 했던 교우관계를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사실 성적만큼 친구와의 우정은 중요합니다. 또 타인과의 따뜻한 감성 소통만큼 좋은 항불안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불안 대처 전략에 따뜻한 교우관계를 늘리는 게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시험불안을 해소하려고 우정을 나눈다는 건 성취 중심의 생각이죠. 그게 아니라 우정이 소중하기에 친구랑 함께 한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고등학교 학생들, 공부하기 바빠 운동이나 문화 생활은 꿈도 못 꿉니다. 그런데 공부 잘 하는 친구들을 보면 운동이나 책 읽기를 놓치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재라서가 아니라 내 몸의 움직임을 느낄 때, 봄의 따뜻한 햇살과 파란 하늘을 바라 볼 때, 마음을 촉촉히 젖게 해주는 책 한 권을 읽을 때, 시험 불안이 줄고 공부 효율이 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를 힘으로 밀어부치며 감정을 마구 조정하다 보면 그 업무를 처리하다 결국 공부 능력이 저하됩니다. 뇌를 행복하게 해줘야 성적이 오릅니다. “아들아, 오늘부터 네 주변의 소소한 행복을 챙기며 인생을 즐기렴”이라고 말을 건네면 어떨까요.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