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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년 전, 건청궁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온라인 중앙일보 2014.04.29 16:21
1 1900년대 초 경복궁 앞.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광화문.



[커버스토리] 소중 시간탐험대 - ①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

소년중앙 시간탐험대는 지난달 말 발대식을 하고 역사여행을 시작했습니다. 1기 시간탐험대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가는 1895년부터 1910년까지를 탐사합니다. 열강들 틈에서 줄타기 하듯 아슬아슬하게 나라를 지켰던 때입니다. 첫 번째는 1895년 10월 8일에 있었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조선에서는 전국적인 항일운동이 일어나고 고종은 자주 독립국가를 꿈꾸며 대한제국을 선포하게 됩니다. 기사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그날의 사건을 토대로 재구성한 이야기와 소중 시간탐험대가 다녀온 답사를 소중 독자도 따라 갈 수 있도록 코스로 소개합니다.



글=황정옥 기자

사진=장진영 기자, 우상조 인턴기자



시간탐험대가 시간을 거슬러 도착한 곳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 기차역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세 발의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시간은 다시 14년을 거슬러,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광화문 앞에 섰습니다. 무장한 일본 낭인패들이 궁궐수비대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경복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왜 시간탐험대를 태운 타임머신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단죄한 곳으로 우리를 먼저 안내한 걸까요. 100여 년 전, 역사의 현장으로 가봤습니다.



#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 기차역



탕! 탕! 탕!



하얼빈 기차역에 총성이 울렸다.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마치고 나온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세 발의 총알이 관통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쓰러졌고 저격한 남자는 그 자리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됐다. 체포될 당시 그는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를 외쳤다. ‘코레아 우라’는 한국말로 ‘대한제국 만세’라는 뜻이다.



을미사변을 가장 먼저 보도한 뉴욕타임스 1895년 10월 12일자(위쪽 사진)와 19일자 풀먼 헤럴드지.
체포된 남자는 안중근이다. 안중근은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을 거쳐 중국 뤼순 감옥에 갇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여러 차례 재판을 받았다. 재판을 받는 동안 그는 당당한 자세로 한일협약 5개 조를 체결한 일, 한일 신협약 7개 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이토 히로부미의 죄명 15가지를 열거했다. 그 중 첫 번째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꼽았다. 그는 이듬해인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5시 30분 경복궁 광화문.



시간을 거슬러 때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30분. 흥선대원군이 탄 가마가 우범선, 이두황이 지휘하는 조선훈련대에 둘러싸여 광화문으로 돌진하고 있다. 수상한 낌새를 차린 궁궐수비대 홍계훈 연대장이 가마를 세우고 즉각 경계 태세를 갖췄다. 그 순간 숨어있던 일본낭인(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패들이 들이닥쳤다. 홍 대장이 낭인패들에게 소리쳤다.



“이곳이 어디인 줄 아느냐, 이 나라의 왕이 있는 곳이다. 너희 같은 무뢰한 낭인들이 들어갈 곳이 아니란 말이다. 썩 물러가거라.”



하지만, 낭인패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권총으로 홍 대장을 무참히 살해하고 흥선대원군의 가마를 방패 삼아 광화문을 지나 흥례문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다.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는 밖과 왕의 공간을 구분하는 명당수 금천이 흐르고 있었다. 금천 위에는 ‘사악한 것들이 궁 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킨다’는 상상의 동물 천록이 납작 엎드려 궁을 지키고 있었다. 금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영제교를 지나면 바로 근정전이 나온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정종·세종·단종·세조·성종·중종·명종·선조 등 조선의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흥선대원군의 가마는 근정전을 지나 사정전에서 멈췄다. 일본 낭인패들은 가마를 팽개친 채 사정전 서쪽 담장을 돌아 황급히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방향에는 건청궁이 있었다. 목적이 분명해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같은 시간, 경복궁 동문 건춘문과 서문 영추문 근처에는 삼삼오오 무리를 진 일본인들이 초조한 듯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장을 하고 있는 군인들이 다수였고 서양 복식과 일본 복식을 한 일본인도 더러 섞여있었다. 그들은 광화문 쪽을 지켜보며 무슨 신호를 기다리는 것 같아 보였다. 이윽고 광화문에서 짧은 총성이 들렸고 이들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일부는 경복궁 담을 넘었고, 나머지는 경복궁의 출입문을 막아섰다. 담장을 넘은 무리는 북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경복궁의 가장 깊숙한 곳. 북쪽에는 건청궁이 자리 잡고 있었다.



2 1887년 건청궁의 모습.


# 새벽 6시. 건청궁 곤녕합



건청궁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기거하고 있었다. 고종은 1863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왕을 대리해 통치함) 아래 있었다. 건청궁은 고종이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담아 1873년 사비로 그것도 몰래 짓기 시작한 건물이었다. 경복궁 전각 중 유일하게 궁이라는 이름을 붙여 ‘궁 안의 궁’이라고도 불렸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 등이 있는 여느 사대부의 집과 다름없는 구조다. 이곳으로 일본 수비대와 낭인패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건청궁에 도착한 일본 수비대와 낭인패들은 처음부터 명성황후가 목적이었다. 건청궁 장안당에 있던 고종을 감금하고 황후를 찾기 시작했다. 고종은 30여 분 전 궁 밖이 소란해진 것을 알고 외교관 이범진에게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명성황후를 피신시키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명성황후는 왕비의 침소인 곤녕합에서 궁녀 옷을 입고 궁녀들 사이에 숨어있었다. 아무리 예를 모르는 오랑캐라도 왕비의 침소까지 들어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일본 수비대와 낭인패들을 황후의 얼굴을 자세히 몰랐던 탓에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베기 시작했다. 궁궐 예법이 몸에 밴 궁녀들은 외마디 비명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리고 결국 황후가 숨어있는 곤녕합에 들어섰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뛰어들며 두 팔로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무례하다. 이곳은 너희가 총·칼을 들고 들어갈 곳이 아니다.”



짧은 총성 한 발. 이경직은 총에 맞아 쓰러졌고 칼을 가지고 있던 낭인이 비웃듯 그의 두 팔을 베어버렸다.



건청궁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는 일본 수비대와 낭인패들이 휘두르는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했다. 일본 수비대와 낭인패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건청궁 동쪽에 위치한 녹산으로 옮겨 시신에 기름을 뿌리고 불태웠다. 재는 건청궁 앞 향원정 연못에 뿌리고 타다 남은 시신은 녹산에 묻었다. 한 나라의 국모가 그것도 아무나 함부로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침소에서 일본 수비대와 낭인패들에게 살해를 당하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을미년에 일어난 변(갑자기 생긴 재앙)’이라 하여 을미사변이라고 불린다. 을미사변은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는 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항일운동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쭉 이어졌다. 이토 히로부미를 단죄하고 법정에 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첫 번째 죄명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꼽은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명성황후 시해를 보도한 외국 신문



을미사변을 가장 먼저 보도한 외국 언론은 미국의 뉴욕타임스(NewYork Times)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나흘 뒤 ‘격동의 서울 사건(Seoul’s Turbulent Affairs)’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나가사키에 있는 카펜터 해군소장이 11일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아주 혼란스런 사건이 벌어졌다고 전문을 보내왔다. 그는 왕비가 암살된 것으로 보이며 왕과 그의 측근들이 미국 공관에 피난처를 마련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공관 대리대사의 긴급한 요청에 따라 요크타운호의 해군병력이 현지의 인력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긴급 파견됐다.”(뉴욕타임스 10월 12일자)



일주일 뒤인 19일엔 워싱턴의 풀먼 헤럴드(Pullman herald)에 관련 기사가 나왔다.



“정치국장인 코우로마 백작이 최근 서울에서의 반란에 대한 보고서를 전달했다.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주도하는 반개혁파에 의해 왕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무장한 채 왕궁에 난입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에서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다뤘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매체인 더 프레스(The Press)는 1895년 11월 26일자 5면에 ‘한국왕비의 암살’이라는 제목으로 암살 배후가 일본임을 시사했다.



“차이나 메일이 한국의 왕비와 시녀 13명의 암살 사건에 관한 상세한 소식을 전해왔다. 약 200명의 군인들이 왕비가 사는 궁전에 난입했으며 일본인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들과 궁궐 수비대 장교를 죽인 암살자들은 반역자들이며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뉴욕타임스 11월 10일자에 실린 ‘한국 왕비의 특징(Characteristics of Queen of Corea)’이란 제목의 기사는 명성황후가 암살의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암살의 두려움을 가졌다. 왕비는 밤을 새우는 습관이 있었고 아침 5~6시까지 침소에 들지 않았다. 침실도 여러 개 있었기 때문에 측근 외에는 어디서 자는지 알 수 없었다. 방 아래엔 비밀통로로 연결되는 작은 문이 있었고 발이 빠른 수행원들이 항상 지켰다. 언제든 즉시 달아날 수 있는 운송수단을 대기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예방책은 소용이 없었다.”



글=황유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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