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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최 뒤에 미 CIA" … 러시아, 음모론 제기

중앙일보 2014.04.29 00:18 종합 18면 지면보기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여당 의원, 역사 지우기·왜곡 노골화
"인터넷도 CIA가 … " 푸틴도 거들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이 대목이 요즘 러시아 상황에 딱 들어맞는다. 거대한 제국, 소비에트의 부활을 꿈꾸는 러시아가 역사를 바꾸고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최근 표적이 된 ‘역사’는 러시아 록음악의 신화로 불리는 빅토르 최(사진)다. 소련 말 저항과 자유의 메시지를 담은 음악으로 젊은이의 우상이 됐지만 1990년 28세에 요절한 한인 3세 록가수다. 그에 대한 음모론이 집권 여당인 러시아통합당의 예브게니 표도로프 의원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소련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노린 미 중앙정보국(CIA)이 빅토르 최의 뒤에 있었다”며 “그가 CIA로부터 곡을 받아 노래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가 지목한 곡은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80년대 말 표현의 자유를 노래한 곡이다.



 표도로프 의원은 “빅토르 최가 훌륭한 가수임에 틀림없지만 어느 순간 다른 종류의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며 “이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고 후기의 곡들을 미국에서 받았다는 게 확인됐다”고도 말했다. 이 발언에 빅토르 최의 팬들은 표도로프 의원을 비난하며 모스크바에 있는 ‘빅토르 최 추모의 벽’에 모여들었다. 젊은 가수들은 공연을 열고 빅토르 최의 노래를 불렀다. 아들인 알렉산드르 최도 지난 25일 사과하지 않으면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표도로프 의원의 음모론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소비에트 붕괴의 책임을 물어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기소를 촉구하는가 하면, 크렘린 내에 미국의 사주를 받는 이들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막무가내식 주장이지만 그의 돌출 행동을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역시 왜곡을 거들고 있기 때문이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 24일 푸틴 대통령은 젊은 언론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인터넷은 CIA의 특별 프로젝트로 개발됐다”며 “그로부터 러시아를 보호해야 한다”고 밝혔다. 구글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미국에 서버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미국에서 감시되고 있다”고 답했다. 러시아의 최대 검색 포털 사이트인 얀덱스조차 “서구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러시아 기업이면서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것이 “세금을 피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목적도 있을 것”이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다.



 푸틴 대통령의 우려를 반영하듯 최근 러시아에선 인터넷을 규제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정부가 법원의 허가 없이 웹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고, 블로거에게도 언론과 같은 법적 책임과 의무를 부여한다는 내용이다. 부정확한 정보를 올릴 경우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인데, 정보의 정확성은 크렘린이 판단하기 때문에 자유를 억압하는 데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과거로 회귀하기 위해 고립을 자초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러시아의 움직임은 더욱 강화될 것이란 전망이다. 러시아 고등경제대학의 블라디미르 리슈코프 교수는 “개혁·개방의 1990년대는 서구에 무릎 꿇은 실패의 역사로 여겨졌다”며 “그러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소비에트의 역사가 성공의 역사로 바뀌어 부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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