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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운명의 속임수 탓, 돈·권력·명예를 행복으로 착각

중앙선데이 2014.04.27 02:08 372호 24면 지면보기
보이티우스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장면을 그린 삽화(1385년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철학의 위안』, 영국 글래스고대 도서관 소장).
보이티우스(480년께~524 혹은 525년)가 지은 『철학의 위안』(524·이하 『위안』)은 서구에서 1000년 동안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다.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권력자들도 『위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찾았다. 영국의 앨프리드 대왕(849~899)과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33~1603)은 아예 『위안』을 직접 영어로 번역했다. 『위안』이 제시하는 행복의 길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30> 보이티우스 『철학의 위안』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고통받고 나쁜 사람이 잘 먹고 잘사는 이유는 뭘까.
“그런 인식은 착각이다.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좋은 것(the good)’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성(聖)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말한 것처럼 악(惡)은 선(善)의 부재(不在), 선이 없는 것이다. 악이 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선이 아니라 돈·권력·명예·쾌락 같은 부적절하고 실망스러운 목표를 추구한다. 그러면서 ‘가짜 행복’을 행복이라고 착각한다. 인간의 의미, 인간에게 궁극적인 것, 진정한 것을 못 보는 것이다.
특히 식욕이나 색욕을 만족시키는 육체적인 쾌락, 물질적인 힘과 용모에 집착하게 되면 잘못된 감정에 익숙해진다. 그 결과 세상의 참모습과 더욱 멀어진다. 부귀영화라는 길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게 된다. 현세적 쾌락이 아니라 덕을 쌓는 데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이 있다. 착한 사람, 선을 행하는 사람, 덕망을 쌓는 사람, 정의로운 사람이 진짜 행복을 차지한다. 선행은 반드시 보답받는다. 선한 자는 신성한 존재가 되고 악한 자는 짐승처럼 된다. 행복이라는 인생의 진정한 목표를 알게 되면 ‘사악한 자들, 범죄자들이 부귀와 행복을 누린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상태이자 인간이 응당 추구해야 할 목표다. 행복은 사람의 내면에 있다. 최고선(最高善·highest Good)과 하나가 되는 게 진정한 행복이다. 최고선은 인간 최고의 목적·이상이자 행위의 기준이 되는 선이다. 신(神)과 최고선을 동일시할 수도 있다.”

『철학의 위안』의 한글판(왼쪽)과 영문판 표지.
미래 아는 神, 인간에게 자유의지 부여
-사람들이 진짜 행복 대신 가짜 행복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행운과 불운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운명의 작용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운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친근하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행운의 속임수에 넘어가면 우리는 돈·권력·명예 같은 게 행복이라는 허상에 빠진다. 목적을 달성한 행운은 전혀 예상 못했을 때 참기 힘든 슬픔과 고통을 남기고 떠나버린다. 그게 운명의 본질이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돈다. 운명은 변덕스럽다. 운명의 본질은 변화다. 하지만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 운명 또한 원인과 결과에 의해 움직인다.
행운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세상의 겉모습만 보게 하는 나쁜 친구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게 해 주는 불운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친구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사실 행운·불운 모두 우리에게 좋다. 운명은 좋은 사람을 훈육하고 나쁜 사람을 징벌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명한 사람은 불운에 희생되는 법도, 행운 때문에 타락하는 일도 없다. 사실 인간은 운명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운명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인가.
“아니다. ‘신성한 이성(divine reason)’인 섭리가 세상을 움직인다. 행운과 불운은 신의 섭리에 종속된다.”

-운명보다 더 강한 신의 섭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사람은 속수무책 아닌가.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 아닌가.
“예정(豫定·predestination)과 예지(豫知·foreknowledge)는 다르다. 예정은 ‘미리 정해진 것’이다. 예지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아는 것이다’. 신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알고’ 있을 뿐이다. 신은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는 것이다. 신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을 거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 먹겠다는 결정을 한 것은 신에 의해 자유의지가 부여된 인간이다. 예정과 예지를 혼동하는 이유는 인간이 체험하는 시간과 신이 체험하는 시간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신은 시간을 초월해 산다. 신은 영원한 현재 속에서 존재한다. 신은 시간을 초월해 영원하다. 인간이 속한 세상은 시간 안에서 영원하다.”

-철학은 위안을 얻고 행복을 추구하는 데 어떤 구실을 하는가.
“철학은 운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 철학을 도구 삼으면 불행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철학적인 성찰에서 나온다. 특히 신의 마음에 대해 더 많이 철학적으로 성찰할수록 사람은 더 자유롭게 된다.”

보이티우스가 이런 내용의 『위안』을 쓰게 된 동기는 자신의 체험에서 나왔다. 그는 두 명의 로마 황제를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보이티우스 자신, 아들 둘이 모두 집정관(콘술·consul) 자리에 올랐다. 25세에 원로원 의원, 510년에 집정관, 520년에는 오늘날의 총리에 해당하는 자리로 행정·사법을 총괄하는 마기스테르 오피키오룸(magister officiorum)이 됐다. 그러나 부러울 게 없던 그는 반역죄 누명을 쓰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의 주군은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한 동고트족 왕 테오도리쿠스였다. 보이티우스는 523년 투옥돼 고문을 당하고 524년 결국 처형됐다. 추락의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그는 특히 외교 특사로 활동했는데,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482년께~565년)와 검은 거래를 한다는 의심을 산 것으로 보인다. 그가 플라톤이 말한 철인왕(哲人王·philosopher king)이 되려고 꿈꿨다는 설도 있다. 아마도 보이티우스가 가톨릭이었으나 테오도리쿠스 왕은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믿었다는 것도 주군-신하 갈등의 배경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순교 인정해 1883년 ‘성 세베리노’로 시성
『돈키호테』, 『동방견문록』, 그람시의 『옥중 수기』 등과 더불어 ‘감옥 문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위안』은 죽음을 앞둔 보이티우스가 감옥에서 고문과 고문 사이에 짬짬이 틈을 내 쓴 책이다. 보이티우스가 자신의 영혼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자 고백록이다. 『위안』에는 산문·운문·대화문이 번갈아 나온다. 보이티우스가 물으면 철학을 의인화한 위풍당당한 여성이 대답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위안』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철학의 조화를 추구했다. 그리스도교적인 내용은 사실상 없고 오히려 신플라톤주의와 스토아학파에 경도됐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책의 제목이 ‘신앙의 위로’가 아니라는 게 의미심장하다. 보이티우스는 융합과 화합의 아이콘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신앙과 철학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데 인생을 바쳤다.

보이티우스는 마지막 로마 철학자이자 첫 중세 철학자, 즉 스콜라 철학자다. 그리스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당시 그리스 문화의 중심인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했다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은 크지 않다. 보이티우스는 늦었지만 1883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성됐다. 순교자라고 인정받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 세베리노 보에시오’라고 부른다.

『위안』의 내용은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종합적이다. 『위안』에 대해 ‘루저(loser)의 자기 합리화’라는 비판도 있다. 극단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돈·권력·명예가 어느 정도 있어야 행복하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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