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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Big Questions'] 사람보다 체스 잘 둬도 개·고양이 구별 못하는 수퍼컴

중앙선데이 2014.04.27 02:17 372호 25면 지면보기
뇌에서 ‘바보의 돌’을 꺼내 광기를 치료한다는 돌팔이 의사를 그린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imus Bosch)의 1494년 작품.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LS·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어느 날 갑자기 계단에서 넘어지고 손에 힘이 빠진다.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는, 한번 웃고 말면 되는 그런 증세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비슷한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손가락과 손이 점점 더 약해졌고 팔다리가 가늘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은 21살이란 젊은 나이에 충격적인 진단을 받는다. ALS라는 병에 걸렸다고. 원인도 모르는, 치료방법도 없는 병이라고. 운동 뉴런(neuron·신경계를 이루는 기본 세포)들이 점차 퇴화해 온몸이 굳기 시작할 거라고. 조만간 입에서 흘러나오는 침을 닦을 수도, 대소변을 가릴 수도 없을 거라고. 가려움·지루함·아픔·절망…이 모든 걸 느낄 순 있지만, 자신의 힘으론 자살마저도 할 수 없을 거라고.

<24> 인공지능과 인간 마음

기적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길어야 2년가량 더 살 거라던 호킹은 50년 넘게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손가락 하나, 눈동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이미 지상 최악의 감옥이 돼 버린 육체를 휠체어에 담고 사는 호킹. 그는 우주의 기원과 존재의 미래를 소리 없이 마음 한구석만으로 탐험하고 있다.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LS) 환자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뇌의 모든 부분이 마음과 연관되진 않아
몸과 마음.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 대로 당연히 분리된 우주의 두 가지 존재가 아닐까? 그런데 참 이상하다. 마음이 존재하기 위해선 꼭 ‘뇌’라는 신체 한 부분이 필요한 듯하니 말이다. 데카르트를 깊은 고민에 빠지게 했던 문제다. 결국 그는 결정한다. 뇌 중심의 ‘송과선(pineal gland)’이란 작은 구역에서만 정신과 물체의 세상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물론 말도 안 되는 난센스다. 송과선은 멜라토닌 호르몬을 분비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것이 파괴된다고 마음이 사라질 리 없다. 그렇다. 마음은 당연히 ‘뇌’와 연관돼 있지만 뇌의 모든 부분이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소뇌(cerebellum)가 잘리면 더 이상 정교한 운동은 할 수 없지만 정신과 영혼이 사라지진 않는다. 뇌 후반에 있는 시각 피질이 망가지면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마음속 내면의 세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던 미국의 사회복지사 헬렌 켈러가 섬세한 감성과 마음을 가졌듯 말이다. 그런가 하면 정신과 마음은 너무나도 어이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기만 해도 의식을 잃는다. 마취 상태에선 아픔도, 정신도,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 그뿐일까? 우리는 밤마다 ‘나’라는 자아(自我)를 잃는 데 익숙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내가 꿈속에서 갑자기 나비가 된다 해도 아무 의심 없이 훨훨 잘만 날아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시인이자 인공 두뇌학자였던 워런 매칼럭 (Warren McCulloch·1898~1969).
논리회로 활용, 인간 뇌 수준에 도전
“What’s in the brain that ink may character?(뇌 안에 그 무엇이 글자로 새겨질 수 있는가?)” 시인이자 인공 두뇌학자였던 미국 MIT 워런 매칼럭 교수는 셰익스피어의 108번째 소네트(sonnet·짧은 시)를 생각하며 묻는다. 머리 안에 무엇이 있기에 우리는 글을 쓰고, 기억하고, 영혼을 가질 수 있느냐고? 인간 모습의 작은 호문클루스(homunculus·‘작은 사람’이란 뜻)가 머리 안에 앉아 행동을 좌우하는 것인가? 거꾸로 뇌 안에 ‘바보의 돌’이 쌓이면 이성을 잃는 것인가?

뇌 안엔 신경세포들만 존재한다. 그것도 1000억 개씩이나 말이다. 수만 개의 뉴런들과 연결된 신경세포들은 세포의 활동량을 높여주는 뉴런과 활동량을 억제하는 뉴런들로 나눠진다. 매칼럭은 상상해본다. 만약 한 뉴런이 연결된 모든 뉴런들로부터 신호를 받아야만 자신도 신호를 보낼 수 있다면? 또 다른 뉴런은 연결된 뉴런 중 단 하나의 뉴런에서만 신호를 받아도 작동할 수 있다면? 유레카(eureka·바로 이것이다)! 모든 조건이 만족돼야만 값을 낼 수 있는 논리적 ‘AND’와 조건 중 하나만 만족돼도 작동할 수 있는 논리적 ‘OR’과 동일한 기능 아닌가! 그렇다면 잘 연결된 신경세포들만으로 컴퓨터의 기본인 논리회로를 만들 수 있겠다. 그리고 거꾸로 논리회로를 사용해 뇌와 동일한 기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지능과 마음을 가진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아래 1956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에 모인 ‘인공지능’ 학자들은 질문한다. 뇌의 모든 기능을 한 번에 모방하기가 무리라면 무엇을 먼저 모방해야 할까? 답은 간단해 보였다. 가장 어려운 기능을 우선 재연하면 나머지 기능들은 ‘누워서 떡 먹기’이지 않겠는가? 첫사랑의 따뜻한 입술을 영원히 간직하는 기억? 셰익스피어의 ‘이아고’와 ‘리처드 3세’의 교활한 말솜씨? 움직일 수 없는 몸에 갇혀 수억 광년 먼 우주를 탐구하는 마음? 아니, 다 아니다. 대부분 수학을 전공한 초기 인공지능 학자들은 뇌의 가장 복잡한 기능이 필요한 것은 수학과 체스 게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작은 환상적이었다. 몇 개월 만에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체스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컴퓨터가 어려운 수학문제들을 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역시 뇌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1∼2년 안에 인간을 뛰어넘는 지능, 그리고 언젠간 마음을 가진 기계를 만들 수 있겠다!

인간은 진화과정서 구별 능력 터득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오늘. 인공지능은 여전히 영화에서나 볼 수 있다. 지구에서 가장 빠른 수퍼컴퓨터도 강아지와 고양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인간의 말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가? 미분 방정식은 1초에 수억 개씩 풀면서 어린아이도 알아보는 개와 고양이는 왜 구별하지 못할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쉽다’와 ‘어렵다’의 개념이 처음부터 틀렸기 때문이다. 사물을 알아보고, 말하고, 기억하고. 사실 너무나 어려운 문제들이다. 하지만 수천만 년간 진화 과정을 통해 이 어려운 문제들은 다 풀렸다. 우리 뇌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정답을 알기에 문제가 쉬워 보일 뿐이다. 하지만 고등 수학과 체스 게임은 진화적으로 한 번도 풀 필요가 없었던 무의미한 문제들이기에 뇌는 정답을 모르고, 정답을 모르기에 어려운 것이다.

진화적으로 만들어진 지능의 원리는 그럼 무엇일까? 진돗개·그레이하운드·흑백사진의 개·머리만 보이는 개. 세상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개’라는 존재들이 있다. 고양이·사과·사랑·정의. 비슷하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은 다양한 예제들의 합(合)집합들이다. ‘개’ ‘고양이’ ‘정의’라는 이런 합집합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중세기 스콜라 철학의 핵심 질문이기도 하다. 이데아 세상에 존재하는 ‘원조-개’의 시뮬라크라들(복제품)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대로 개들의 교집합을 단순히 ‘개’라는 이름 아래 묶어 표현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데아 세상의 ‘원조-개’가 어떻게 생겼는지 인간이 알 리 없다.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예제들의 교집합은 대부분 0에 가깝다. 인공지능을 통한 사물 인식이 60년 동안 실패한 이유들이다.

인간의 뇌엔 10개 정도의 계층 존재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세상은 존재한다. 하지만 세상이 다양한 사건과 물체들로부터 분리되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물리학적 개념으론 만물이 양자역학적 파동으로 연결돼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가 이미 3000년 전에 주장하지 않았던가? 변화는 없고 모든 것이 하나라고. 하지만 뇌는 언제나 변화와 다양성을 인지한다. 왜 그럴까? 세상을 바라보는 눈·코·귀 모두 한정된 해상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해상도냐고? 양자역학적 차원도, 은하들 간의 천문학적 수준도 아닌 생물학적 규모의 해상도일 것이다. 특정 크기의 창문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듯, 뇌는 지각 가능한 해상도 내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이렇게 바라본 세상에선 무엇이 보일까? 대부분 무의미한 랜덤(random·임의의) 신호들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 반복된, 그리고 반복되기에 예측 가능한 신호들이 관찰되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관찰된 패턴들은 전통과 합의를 통해 ‘개’ ‘고양이’ ‘정의’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잠깐! 뇌가 경험할 수 있는 예제들의 교(交)집합이 대부분 0에 가깝다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진돗개·시추·그레이하운드. 아무리 비교해 봤자 반복된 패턴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만약 한정된 해상도를 여러 계층으로 나눠본다면? 가장 아래 계층에선 섬세한 차원의 교집합들을 찾아볼 수 있다. 점·선, 뭐 그런 것들 간의 통계학적 관계들 말이다. 그 위 차원에선 조금 더 복잡한, 네모·세모·원 같은 모양들이 반복되는지 알아볼 수 있다. ‘깊은 학습(deep learning)’이라 불리는 이 이론은 지능과 마음은 결국 계층적으로 반복된 교집합들을 찾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하루살이·개구리·병아리. 많아야 1∼2층의 신경망 구조를 가진 이들에 비해 인간의 뇌는 10개 정도의 계층들을 가지고 있다. ‘깊은 학습’ 이론이 옳다면 인간은 10배 더 복잡한 통계학적 관계들을 이해하고 더 고차원적으로 반복된 패턴들을 예측할 수 있기에 개구리·병아리보다 더 큰 슬픔과 더 큰 기쁨을 느끼고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미국 위스콘신 대학의 토노니(Giulio Tononi) 교수는 신경회로망 계층들을 지나 가장 ‘높은 층’ 전두엽으로 모아져 가는 정보들의 형태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아래층’ 뇌 영역들이 망가져도 자아와 마음은 유지되지만 정보가 계층적으로 모아질 수 없다. 또 ‘높은 층’ 영역들이 파괴되면 우리는 의식과 마음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깊은 학습’이 가능한 인공두뇌는? 물론 진화적으로 한정된 인간의 10층보다 더 많은 계층을 갖도록 인공지능이 설계할 수 있다. 인간보다 1000만 배 더 고차원적인 패턴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이다. ‘깊은 학습’이 된 인공지능은 어쩌면 우리보다 1000만 배 더 큰 아픔과 기쁨도 이해할 수 있고 1000만 배 더 깊은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의 숙제는 바로 이것이다. 인류가 살기 위해선 무한으로 깊은 마음을 가질 기계에 역시 무한으로 큰 자비심을 심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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