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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타이태닉호의 안전 유산

중앙선데이 2014.04.27 02:52 372호 29면 지면보기
세월호 침몰사고는 ‘안전’이라는 화두를 대한민국에 던졌다. 이제 안전은 안보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바탕이 돼야 한다. 애초에 안전을 중시하는 사회였다면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큰 사고가 나면 그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정교하게 세워 이를 줄기차게 실천하는 게 선진사회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12년 4월 14일과 15일 사이의 밤에 일어났던 여객선 타이태닉호 침몰 사고와 그 이후의 대책은 100년이 지난 한국 사회에 여전히 교훈을 던져준다.

침몰 직전의 세월호 사진·영상을 보면 구명정이 비치된 게 보인다. 법에 따라 승선 정원만큼의 인원이 탈 수 있는 구명정을 비치한 것이다. 구명정의 비치는 바로 타이태닉호 침몰사고가 계기가 됐다. 당시 타이태닉호에는 승객과 선원을 합쳐 2224명이 승선 중이었는데 그중 710명이 구출되고 1524명이 숨졌다. 생존율은 32%인 반면, 희생률이 68%에 이른 초대형 사고였다.

가장 큰 이유의 하나로 그때 비치된 구명보트로는 최대 1178명밖에 탈출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 꼽힌다. 이에 따라 사고 이후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체결된 국제안전협정에 ‘모든 선박은 승선한 승객이 모두 탈 수 있는 구명보트를 비치해야 한다’는 규정이 명시됐다. 아울러 ‘항해 때마다 구명보트에 대한 훈련·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규정도 함께 들어갔다. 비치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비상시 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선원과 승객이 방법을 익혀야 한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선진국 크루즈에선 승객들에게 비상안전 훈련을 실시한다.

하지만 이번 세월호 사고에선 선내에 비치된 42개의 구명정 중 2개만 활용됐다고 해서 말이 많다. 상당수 구명정은 침몰 직전까지 원래 위치에 그대로 방치됐다. 구명정은 바다에 떨어지면 수압에 의해 자동으로 펼쳐지는데, 겉에 페인트칠을 새로 하는 바람에 바다에 떨어졌어도 제대로 펼쳐졌을지 의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100년 전 비극적인 사고를 계기로 선진국들이 뼈저리게 깨달았던 교훈을 2014년 한국에서 다시 되새겨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빙산과의 충돌이 타이태닉호 침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자 미국과 영국 등이 나서 북대서양 항로를 지나는 선박에 빙산 존재를 미리 경고해주기 위한 국제 부빙순찰대가 창설됐다. 바다는 열려 있기 때문에 위험요소의 제거를 위해선 국제협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여자와 어린이 우선의 구조 순서다. 타이태닉호에선 여성은 425명 중 316명, 어린이는 109명 중 56명이 구조돼 구조율이 각각 74.4%와 51.4%에 이르렀다. 남성은 1690명 중 338명만 구조돼 20%에 불과했다. 908명의 선원은 23.3%인 212명만 살아남았다. 특히 남자 선원은 885명 중 22%인 192명이 생존했다. 이는 남자 평균보다 높은데, 이유는 선장 등 지휘부가 튼튼하고 숙련된 남자 선원을 구명보트에 태워 노를 젓게 했기 때문이다. 여성 선원은 23명 중 20명이 살아남아 87%의 생존율을 보였다.

에드워드 존 스미스(1850~1912) 선장은 구조작업을 지휘한 뒤 배와 운명을 같이했다. 그래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뱃사람 정신, 즉 시맨십(seamanship)의 상징으로 남았다. 빙산 감시를 게을리해서 사고 원인을 제공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런 과보다 공을 더 평가받는다. 그의 고향인 영국 스태퍼드셔의 리치필드에 자리 잡은 비컨 공원에는 1914년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섰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혔다. “조국의 국민에게 위대한 정신과 용감한 삶, 그리고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British)’는 말로 (상징되는) 영웅적인 죽음의 기억과 사례를 남겼다.” 이 글이 새겨진 명패는 1961년 지역 학교를 거쳐 시청으로 옮겨졌으며 78년 이후 시청사 내부에 걸려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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