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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전 죽음의 강 건넜던 민초 … 그들의 기도와 만나다

중앙일보 2014.04.25 00:21 종합 21면 지면보기
충남 서산의 해미순교성지 기념관. 이곳에서 숱한 천주교 신자들이 생매장 당했다. 8월 방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 순교터에서 무릎 꿇고 기도를 한다. [백성호 기자]


세월호 참사에 위로의 메시지를 보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한국을 찾는다. 충남 일대의 천주교 순교지를 돌아보고, 서울에서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식도 거행한다. 그리스도교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오던 시절, ‘죽음의 강’을 건너갔던 조선의 순교자들. 충남의 여사울-합덕-솔뫼-신리-홍성-해미로 이어지는 순례길에는 그들이 남긴 마지막 발자국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둘러볼
충남 일대 천주교 성지 순례길



신문물에 유연, 천주교 쉽게 받아들여



프란치스코 교황
 충남 서해안에서 땅이 오목하게 들어간 지역이 내포(內浦)다. 거기로 바닷물이 들어온다. 그 물길 따라 고려 말에는 성리학이 들어왔다. 무역이 성했고, 문물의 주고 받음에 유연했다. 이곳의 성리학은 다른 지역에 비해 경직되지 않았고, 조선 후기에는 실학자가 많이 배출됐다. 이 길로 천주교도 들어왔다. 한때 내포는 그 이름만으로 공포스러운 지역이었다.



 당진 합덕면에는 합덕성당이 있다. 1890년에 설립됐다. 널따란 평야의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랜드마크다. 합덕에선 아무 동네나 들어가도 조상 중에 순교자가 있다. 그만큼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김성태(41) 주임신부는 “90세가 넘으신 어르신들께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베뚜리, 바뚜리’ 이야기를 했다. “조선시대 때 농사를 짓는데 가물 때가 있다. 그럼 신자들은 성 베드로 축일이자 성 바오로 축일인 6월 29일에 맞춰 기도를 했다. 비가 오게 해달라고. 그럼 비가 왔다.” 신자가 아닌 이들도 가뭄이 오래가면 그날을 기다렸다. 대신 축일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신자의 집을 찾아와 이렇게 묻곤 했다. “베뚜리, 바뚜리가 언제유?”



 논밭에서 새참을 먹을 때 신자들은 십자가 성호를 그었다. 비신자들의 눈에는 그게 파리 쫓는 걸로 비쳤다. 그래서 새참을 먹을 때는 늘 “얼른 와서 빨리 파리 쫓아. 그래야 밥을 먹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당의 종이 울리면 흰옷 입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논두렁을 따라 줄지어 걸어왔다. 멀리서 보면 장관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합덕리 85가구 중 95%가 천주교 신자다.



“파리 쫓고 밥 먹자” 말하고 성호 그어



맨 위 사진은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문초를 당했던 홍성의 순교터인 홍주 감옥. 가운데는 조선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솔뫼성지. 아래는 조선 최대 교우촌 신리에 세워진 다블뤼 주교의 동상과 초가 주교관.
 당시에는 거대한 문명의 충돌이었다. 그리스도교 문화와 유교 문화,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의 충돌. 조선은 유교 이데올로기로 유지되던 사회 체제가 무너질까봐 두려워했다. 한사코 서양 종교가 들어오는 걸 막았다. 그 와중에 숱한 순교자가 나왔다. 밤이 됐다. 성당의 첨탑 위로 별이 내렸다. 150년 전, 순교자들도 저 별을 보며 기도를 했으리라.



 이튿날 합덕에서 신리로 갔다. 신리(新里), 요즘말로 ‘뉴타운’이다. 1860년대 조선에서 가장 큰 천주교 교우촌이었다. 마을 주민 400여 명이 모두 신자였다. 그중 기록으로 확인된 순교자만 42명이다. 당시 프랑스 다블뤼 주교(제5대 조선교구장)가 이곳에 머물렀다. 지금도 초가로 된 주교관이 남아 있다. 김동겸(36) 신부는 “다블뤼 주교가 이곳에서 10년간 머물며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썼다. 그 책의 기록이 없었다면 조선의 순교자들이 103위 성인이 되고, 124위 복자가 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책에는 8월에 시복될 윤지충 바오로가 고문을 당하며 주고받은 문답도 기록돼 있다. 매질을 한 뒤에 감사가 묻는다.



 “너도 양반인데 이 형벌이 고통스럽지 않느냐?”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저라고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감사는 다시 형리에게 매 열 대를 치라고 한다. 다시 묻는다.



 “네가 죽게 되어도 그 종교를 버리지 않을 것이냐?” 윤지충이 대답한다.



 “그 크신 저의 아버지를 배반하고서 살아서건 죽어서건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병인박해(1866년) 때 이 교우촌은 초토화됐다. 순교의 기록을 남겼던 다블뤼 주교도 결국 프랑스 신부들과 함께 체포돼 순교했다.



순교 기록 남긴 프랑스 신부도 처형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시아청년대회’ 폐막 미사를 서산 해미 읍성에서 집전한다. 해미는 무명 순교자들이 생매장 당한 천주교 성지다.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박해 때 붙잡힌 신자들이 해미 읍성 서문에서 나와 사형장까지 약 1.2㎞를 걸어갔다. 죽음을 향해 걷던 그들은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를 계속 불렀다. 길거리에서 그걸 지켜보던 비신자들의 귀에는 “여수머리, 여수머리”라고 들렸다. ‘여수’는 여우의 사투리다. 여우에 홀린 머리채로 죽어갔다고 사람들은 그들이 묻힌 곳을 ‘여숫골’이라고 불렀다.



 해미성지 백성수(63) 담당신부는 “예루살렘에 ‘십자가의 길’이 있다.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십자가를 메고 골고타 언덕까지 걸어갔던 길이다. 이 길은 해미에 있는 십자가의 길이다. 순례객들은 이 길을 걸으며 삶과 죽음을 묵상한다”고 말했다.



당진=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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