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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의 야구노트] 형·동생 아닌 동업자, 그것이 프로다

중앙일보 2014.04.22 00:25 종합 25면 지면보기
한화 정근우가 20일 LG전 6회에 정찬헌의 공을 맞고 아파하고 있다. 8회에도 사구를 맞은 정근우가 항의하자 양팀 선수들이 몸싸움을 벌였다. [대전=정시종 기자]
프로야구 선수들은 인사를 참 잘한다. 올 시즌 개막전이었던 3월 29일 잠실경기에서 두산 김현수(26)는 1회 LG 투수 김선우(37)를 향해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지난해까지 두산에서 뛰었던 선배에 대한 예의였다.


정찬헌, 연속 몸에 맞는 볼
사과 없어 LG·한화 몸싸움
"사구 땐 투수가 사과" 합의
선수들 스스로 만든 룰 깨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17년을 뛰고 2012년 한화에 입단한 박찬호(41·은퇴)도 수많은 인사를 받았다. 그와 처음 상대하는 각 팀 1번 타자들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인 뒤 첫 타석에 들어섰다.



 한국 야구선수들은 처음 만나도 죄다 선후배로 얽힌다. 전국 50여 개 고교 팀에서 뛴 선수들의 위계가 프로까지 이어진다. 제10구단 kt까지 합쳐도 프로야구 선수는 총 800~900명 정도다. 몰랐던 사이라도 다리 하나만 건너면 형·동생이 된다.



 지난 20일 대전경기에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LG 투수 정찬헌(24)이 한화 정근우(32)에게 두 차례나 몸맞는공(사구)을 던졌기 때문이다. 시작은 사구가 아니라 인사였다.



 정근우는 6회 말 시속 146㎞짜리 직구에 등을 맞았다. 정찬헌은 미안하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다음 타자의 땅볼 때 정근우는 2루로 뛰다 오른발로 LG 유격수 오지환의 오른 정강이를 쳤다. LG 선수들은 이 장면에서 분노했다.



 정근우는 8회 말 정찬헌이 던진 시속 145㎞ 직구에 앞서와 거의 같은 곳을 얻어맞았다. 정황상 빈볼이 확실했다. 한화 선수들이 분노했다. 양팀 선수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그라운드에서 대치했다. 퇴장 명령을 받은 정찬헌은 21일 한국야구위원회(KBO)로부터 벌금 200만원과 출장정지 5경기의 징계를 받았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는 지난겨울 각 팀 주장을 모아 ‘동업자 정신’을 강화하자고 결의했다. 여기에는 ‘투수가 사구를 맞혔을 때 타자가 후배라고 해도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프로야구에 종사하는 동업자로서 상대를 크게 위협한 행위에 대해서는 선후배를 따지지 말고 사과하자는 취지다. 지금까진 사구를 맞힌 투수가 후배일 때 선배 타자에게 사과하는 게 관례였다. 사구를 맞는 건 참아도 후배가 사과하지 않는 걸 참지 못하는 선배가 꽤 많았다. 반대로 선배 투수가 후배 타자를 맞히면 별말 없이 걸어나갔다.



 2012년 6월 6일 한화 김태균(32)은 롯데 김성배(33)가 던진 공에 허리를 맞았다. 김태균은 1루로 걸어나가며 “왜 사과하지 않느냐”고 소리쳤다. 김태균은 김성배가 자신보다 후배인 줄 알았다. 뒤늦게 서열을 알아챈 김태균은 다음날 김성배를 찾아가 사과했다. 사구를 맞은 선수가 선배를 몰라봤다는 이유로 사과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이런 장면을 본 외국인 선수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국내 선수들도 이제는 사구 문제를 선후배 관계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사구를 맞혔다고 투수가 타자에게 사과하는 일은 거의 없다. 타자를 1루로 보낸 것으로 충분한 페널티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또 투수가 사과하는 순간 타자에게 지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대신 타자들은 몸쪽 공간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믿는다. 빈볼이 날아들면 투수와 과격한 몸싸움도 불사한다.



 일본 프로야구에선 사구를 맞힌 투수가 타자에게 미안함을 표하는 게 보통이다. 고교 팀이 3000여 개나 되는 일본에선 다른 팀 선수들과 선후배를 까다롭게 따지지 않지만 상대에게 위해를 가했다면 사과한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차이다.



 한국 프로야구의 형·동생 문화는 강한 팀워크를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소속팀이 달라도 형·동생들은 금세 손발을 맞추고 힘을 모아 강한 대표팀을 만들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미국·멕시코·일본 등 야구 강대국을 꺾은 비결이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었을 때 형·동생을 따지는 건 다른 문제다. 선수들도 프로야구에서 형·동생 문화는 점차 사라져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선수협 이사회에선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걸 막기 위해 상대팀 더그아웃이나 라커룸·실내훈련장 출입을 금지한다’는 약속도 했다.



 사구를 맞힌 뒤 인사를 하자는 건 KBO나 구단이 아니라 선수들이 만들었다. 스스로 만든 룰을 한 달도 되지 않아 깨뜨렸다. 처음 만나 요란하게 인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안할 때 가볍게라도 사과하는 게 진짜 예의고, 존중이다.



글=김식 기자

사진=정시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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