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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고려 귀족 우아한 茶 문화 뒤엔 백성들의 피와 땀

중앙선데이 2014.04.20 03:09 371호 26면 지면보기
차 문화가 번성한 고려 시대에는 뜻이 맞는 벗에게 차를 가는 맷돌이나 물 끓일 때 쓰는 철주전자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규보도 맷돌을 받고 감사의 뜻으로 『사인증다마(謝人贈茶磨)』라는 시를 썼다. [교토국립박물관]
고려 무신정권의 격변기를 살던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30여 편의 다시(茶詩)를 남겼다. 그 시대는 동시에 차 문화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이미 연고차인 유차(孺茶)나 조아차(早芽茶) 같은 극품의 차가 생산되었고, 흰 다말(茶沫)의 예술미를 감상할 수 있는 흑유(黑鍮: 검은 바탕에 금을 상감한 것) 계통의 금화오잔(金花烏盞)이나 청자 다완(茶碗)이 널리 사용되었다. 사원에서는 차품을 감상하거나 차 맛을 겨루는 명전(茗戰: 차를 다루는 솜씨를 겨루는 놀이)이 성행한다. 고려 중기의 문인 이연종(李衍宗)은 『사박치암혜차(謝朴恥庵惠茶)』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명전을 이렇게 썼다.

<5> 이규보

젊은 시절, 영남의 절에 손님으로 가서(少年爲客嶺南寺)
여러 번 스님 따라 명전 놀이 했었지(茗戰屢從方外戱)
용암의 바위 가장자리, 봉산의 기슭에서(龍巖巖畔鳳山麓)
대나무 사이로 스님 따라 매부리만 한 차를 땄네(竹裏隨僧摘鷹觜)
한식 전에 만든 차가 제일 좋다고 하는데(火前試焙云最佳)
더구나 용천과 봉정의 물이 있음에랴(況有龍泉鳳井水)
사미승, (차 다루는)삼매의 날랜 솜씨(沙彌自快三昧手)
백설 같은 다말(茶沫), 찻잔에 따르기를 그치지 않네(雪乳飜甌點不已) 『동문선』권7

이규보 영정.
차 문화를 주도했던 승려들은 좋은 차와 물을 감식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차 전문가들이었다. 이규보는 『화숙덕연원(和宿德淵院)』에서 ‘늙은 승려 일도 많구나/차를 평하다가 다시 물맛을 평하려니(老衲渾多事 評茶復品泉)’라고 썼다. 고려 시대엔 승원(僧院)에서 명전 놀이를 즐겼는데, 이는 음다 풍류의 극치였고, 도락이었다. 시에선 특히 젊은 시절 이연종이 영남의 절에서 명전 놀이를 했고, 스님을 따라 차를 땄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그가 말한 용암이나 봉산, ‘대나무 사이’는 최상의 차 잎을 얻을 수 있는 생육환경을 말한 것이다. 사원에서 만든 극품의 연고차가 매부리만 한 작은 차 싹으로 만든 것이라는 점도 확인된다. 사미승의 차 다루는 솜씨를 ‘삼매의 날랜 솜씨’라 한 것도 재미있다.

명전 놀이가 언제 시작됐는지 알 수 없지만 중국 송(宋)대에 유행했던 투차(鬪茶) 놀이가 고려에 소개된 뒤 성행했을 것이라 짐작될 뿐이다. 중국의 투차 놀이는 상인이나 백성들도 즐겼던 일반적인 차 유희였던 반면 고려의 명전 놀이는 승려나 문인들로 제한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차 문화가 귀족사대부를 중심으로 발전한 문화였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자신과 가까운 문인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이규보의 『연보』에 따르면 혜문 스님과 희 선사가 이규보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숯과 쌀, 솜을 보내 도움을 줬다. 이규보는 약관의 나이에 죽림고회(竹林高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무인난 이후 출세를 단념한 일부 문인이 산림에 은둔해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 모임이 유행했으니 이것은 바로 진(晉)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한 것이다. 그의 『칠현설(七賢說)』은 죽림고회의 결성 내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난 아무개 등 일곱 사람이 스스로 당대의 호걸이라 하면서 마침내 서로 어울려서 칠현이라 하니 대개 진의 7현을 사모한 것이다. 늘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자기들 외에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했다. 세상에서 비방하는 말이 많아지자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내 나이는 바야흐로 19세였다.(先輩有以文名世者某某等七人 自以爲一時豪俊 遂相與爲七賢 蓋慕晉之七賢也 每相會飮酒賦詩 旁若無人 世多譏之 然後稍沮 時予年方十九)”

당시 죽림고회에 참석한 인사는 모두 7명이었다. 당대에 문장가인 오세재(吳世才·1133~?), 임춘(林椿), 이인로(李仁老·1152~1220), 조통(趙通), 황보항(黃甫抗), 함순(咸淳·1155~1211), 이담지(李湛之)등이 참여했다. 특히 무신난 이후 가장 명망이 높았던 이인로와 임춘이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며 죽림고회의 일원이 됐다는 점이 주목된다.

차 마시는 즐거움을 쓴 시가 수록돼 있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규보는 11세 때 이미 글 잘하는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거듭 과거에 낙방해 40세에 한림원 관리가 된다. 그의 이러한 어려움은 그의 말대로 ‘4~5년 동안 술로 기세를 부리며 마음대로 살면서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고, 오직 시 짓는 것만 일삼고, 과거에 대한 글은 조금도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쓴 ‘연보’에서 이규보가 ‘주필이당백(走筆李唐白)’이라 칭송돼 시선(詩仙) 이백(李白)에 비견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그의 시가 탁마를 통해 갈고닦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술 취해 붓을 들면 호연(浩然)한 장부의 흉중만어(胸中滿語)가 물처럼 흘렀으리니 시학에 뜻을 둔 자라면 누구인들 흠모하지 않으랴.

그가 남긴 다시(茶詩)에서 음다의 즐거움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를 차의 깊은 심연(深淵)으로 안내한 것은 육우의 『다경』과 노동의 『칠완다가(七碗茶歌)』였다. 이 글은 당시 사대부라면 읽는 보편적인 도서였던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숙빈강촌사(宿瀕江村舍)』의 ‘묵은 책은 다 흩어져 『약보』만 남았고, 모아둔 물건 뒤져보니 『다경』이 있네(散盡舊書留藥譜 檢來餘蓄有茶經)’라는 구절에서도 드러난다. 승원을 찾아 그와 교유했던 방장스님의 담담하고 청빈한 음다 풍모를 『부용전운증지(復用前韻贈之)』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초연한 방장스님, 물건 하나 없는데도(蕭然方丈無一物)
솥에서 물 끓는 소리 듣기 좋구나(愛聽笙聲號鼎裏)
차와 물을 평하는 것이 불교의 가풍이니(評茶品水是家風)
양생 위해 천년의 복령(茯笭)이 필요하지 않네(不要養生千歲虆)
사랑스럽게 막 돋아난 차 싹, 빨리 따서(憐渠給給抽早芽)
늙은 스님에게 먼저 올리려는 듯(似欲先供老衲子)
잠꾸러기 종놈이 훔쳐 맛보고(睡鄕癡漢亦偸嘗)
지난번 우레처럼 코 골던 소리 잠잠하구나(失却從前雷鼾鼻) 『동국이상국전집』 권13

이 시는 수행이 깊어 물욕조차 끊어지고 소유품이 단지 물 끓이는 솥단지뿐인 늙은 스님의 담담한 경지를 보여준다. 원래 차의 심오함은 수행자가 터득한 이치다. 그러므로 물과 차 맛의 품평은 본래 스님들의 일상사였다. 차는 원래 맑음을 상징한다.

이는 차의 진실한 가치다. 깃털처럼 가벼워지기 위해 신선들은 차를 즐겼던 것. 그러므로 차를 즐기는 승려, 무슨 연유로 불로초를 구하려 했겠는가. 세상에 귀한 차는 부처님과 스님들께 올리는 법이다. 귀한 차가 좋다는 걸, 잠꾸러기 종놈인들이 모르랴. 노스님, 맛을 보기 전에 종놈이 먼저 차 맛을 보고, 차의 황홀한 경지에 빠져버렸다. 차의 담백한 선미(禪味)란 원래 이런 것. 이규보는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듯, 시 한 수로 이런 차의 세계를 잘도 드러냈다.

고려시대 차의 생산지는 전라도와 경상도였다. 화계와 순천 지역에서 고급 차가 생산된 듯하다. 당시도 나름의 차의 포장 방법이 있었는데, 이는 ‘맑은 향취 새어 나갈까 염려하여 상자 속에 겹겹이 넣고 칡덩굴로 묶었네(爲恐淸香先發洩 牢鎖縹箱纏紫蘽)”라고 한 것이나 이규보의 벗 일암거사 정분이 보낸 차가 ‘하얀 종이 바른 함에 붉은 실로 얽어 있다(粉牋糊櫃絳絲纏)’는 표현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에도 습기나 잡향에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상자 속에 넣어 보관했다. 차 보관의 중요성은 이규보의 『고우가(苦雨歌)』에서도 드러나는데 ‘상자 속의 좋은 차는 맛이 많이 변했으니 (차를)달여 먹은들 잠을 쫓지는 못하리(箱底芳茶貿味多 不堪烹煮驅眠魔)’라고 한 것이다. 차가 한번 오염되면 정기를 잃는다는 사실을 ‘잠을 쫓지는 못하리’로 에둘러 표현했다.

고려시대엔 뜻이 맞는 벗에게 차를 가는 맷돌이나 물을 끓일 때 필요한 철병(鐵甁: 철로 만든 주전자)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규보가 남쪽 사람이 철병을 보냈기에 차를 달이며 쓴 『득남인소향철병시차(得南人所餉鐵甁試茶)』와 차 맷돌을 보낸 사람에게 감사하며 쓴 『사인증다마(謝人贈茶磨)』에서 확인된다.

한편 음다 풍속이 사치해지고, 다양한 다회가 열렸던 고려중·후기에는 관부의 차세(茶稅) 핍박이 대단했다. 이런 가렴주구(苛斂誅求)는 날로 가혹해졌던 듯하다. 당시 이규보는 손한장에게 ‘과도한 차세를 금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내용의 시를 보낸다. 바로 『孫翰長復和次韻寄之(손한장부화차운기지)』는 차세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의 고통을 나타낸 것이다. ‘관에서 감독하여 늙은이와 어린아이까지 징발하였네(官督家丁無老稚)’라고 개탄했다. 차를 만들기 위해 노인과 어린이까지 차출하고, 만든 차는 서울까지 등짐으로 날라야 했다. 일정량의 차를 해마다 바치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차는 백성의 애끊는 고혈이니, 수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얻은 것(此是蒼生膏與肉 臠割萬人方得至)’이라고 정의했다. 당시 농민들은 차세를 피해 차나무에 불을 지르고, 차가 나는 산림을 훼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악순환을 해결하기 위해 이규보는 ‘산림과 들판을 불살라 차의 공납을 금한다면 남녘 백성들이 차세 면함은 이로부터 시작되리(焚山燎野禁稅茶 唱作南民息肩始)’라고 했다.

차로 인한 원성이 얼마나 깊었던지 조선이 건국된 뒤 왕실에선 차는 퇴출됐다. 하지만 차의 맑고 고상한 풍류는 원래 그런 것은 아니다. 이 폐단은 호사가의 욕심이 불러온 것일 뿐이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론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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