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갑수 칼럼] 20세기 장인의 시대가 그리운 걸 어쩌랴

중앙선데이 2014.04.20 03:13 371호 27면 지면보기
2012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는 밥 딜런(1941~). 필자 김갑수씨는 전자메일 주소에 딜런을 쓴다. [위키피디아]
사람들이 만나 대화를 나눈다. 말과 말 사이를 잇는 것은 서로의 경험들이다. 그들이 만난 사람, 찾아간 장소, 함께한 사연들. 모든 대화란 체험들의 변주와 같다. 그런데 나는 대부분의 이야기에 끼어들지를 못한다. 남들과의 공통체험이 부재한 탓이다. 어제도 그제도 또 오래전에도 내 일상은 변함없이 단조롭다. 생계를 위한 방송 활동 외의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앉아 있다. 방 안에서, 홀로 그림처럼, 아무 말 없이.

[詩人의 음악 읽기] 자발적 고립 인생

가령 지금 당장 내가 말할 수 있는 직접 체험의 화제라면 이렇다. “영국산 RGD 1046 파워앰프의 진공관을 PX4에서 마즈다의 PP3-250으로 교체했어요. 커플링 콘덴서도 같은 영국제 오일 타입인 1950년대 듀블리에로 바꿨는데 음질이 엄청 끈적끈적해지면서 배음이 살아나는군요. 소리의 질감이 확 달라졌어요!” “그 RGD 앰프를 트랜스 프리인 웨스턴 일렉트릭 22D에 주로 매칭시켰었는데 최근에 입수한 CR 타입의 프리앰프 프리시전 피델리티 C-4로 바꾸니 바이올린 소리가 엄청 야들야들해지는군요. 현에서 송진가루가 묻어나오는 것 같아요.” 어제도 그제도 또 오래전에도 변함없는 오디오 관심.

여기 덧붙여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수전 웡의 ‘섬원 라이크 유’는 두께감이 아쉬워요. 그보다는 점점 늙어가는 마들린 페이루의 하소연하는 듯한 뉘앙스가 더 좋죠. 며칠 전 예스24에 주문한 리이슈 LP 24매가 배달돼 왔는데 새삼 듀크 엘링턴 빅밴드의 창의적 아이디어에 놀랍니다. 듀크는 1950년대에 이미 2000년대 첨단 사운드를 다 마스터했어요. 자니 호지스와 클라크 테리, 두 장인의 뒷받침이 있어서 대중성까지 가능했던 것 같군요.” 뭐 이런 경탄.

1978년의 밥 딜런.
음악이나 오디오 쪽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암호문 같을 관심사 속에서 해가 가고 달이 간다. 즐거운 지옥, 자발적 폐인의 세계가 음악동네다. 결국 이러다가 언제쯤 영안실에 누워 있게 될 것이다. 내 결혼식 때 하객 상당수가 판가게 주인과 오디오상이었듯이 영안실에 문상 올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음악 상인들과의 교류도 이 세상의 일일 텐데 통상 사람들은 이쪽 세상에 끼워주지를 않는다. 별세계에서 묘한 것 좋아하고 이상한 데 돈 쓰는 부류로 제쳐버린다. 별 수 없이 어제도 그제도 의자다. 홀로, 말없이, 그러나 이 판 저 판 나름대로 분주하게. 어쩌면 이 방 안이 이미 영안실인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는 상태와 저 세상으로 넘어간 상태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듯 하루하루가 무상하고 아련하기만 하다.

음악을 사랑해 자발적 고립의 상태로 한 생을 살아 왔다. 일과 상관없는 만남에 누구도 나를 끼워주지 않는다. 드물게 연락이 올 때도 있다. 저녁나절 강남 어느 바에 몇몇이 만나서 술자리를 갖는다고. 매력적인 상담가 배정원씨도 나온다니 거기 어울려 웃고 떠들고 싶다. 하지만 돈 체리나 프레디 허버드의 트럼펫이 발길을 붙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면 약속시간은 훨씬 지나 있고 왜 안 오느냐는 문자에 대충 둘러대는 응답을 하고 만다. 일이 바빠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사죄의 말 대부분이 실은 LP판을 좀 더 돌리는 일일 뿐이다. 바로 어젯밤 이슥한 시각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었다. “당신 오늘도 바빴어?” “응. 원고 써야 하고 강의 준비도 있었고 뭐뭐…” 아뿔싸! 결혼기념일이었던 걸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아내는 혹시나 하고 전화를 기다렸던 모양인데 정말 미안하다, 아내. 어쩌다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그런데 떠올려 보니 지난해도 지지난해도 마찬가지였다. 왜 언제나 생일이며 결혼기념일이 생각나지 않을까. 왜 아내는 그날을 미리 일깨워주지 않을까. 가만 생각해 보니 대부분의 그런 날에 작업실에서 홀로 판을 돌리고 있었던 것 같다(갑자기 심장에 뻐근한 통증이…).

이런 생각도 한다. 누구나 일을 한다. 하지만 일만 할까. 일 바깥의 시간에 누구는 개미를 관찰하고 누구는 목공작업을 하고 또 누구는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면. 모두가 각자의 자발적 유폐를 즐기며 산다면. 저녁의 술집 대부분이 문을 닫고 그 주인과 손님들이 개미, 목공, 수채 등으로 홀로의 시간을 보낸다면. 그러면 세상은 너무 심심해질까. 과연 그럴까. 사랑하는 음악과 살아가는 일이 내게는 최소한 등가의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 통장의 월 수입과 남북관계와 베토벤의 교향곡이 동등하게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 더. 지금 몸담고 있는 재미없는 21세기보다 흘러간 20세기 장인들의 시대가 훨씬 더 흥미롭고 중요하다. 그 시절에 하이페츠가 있었고 글렌 굴드, 마일스 데이비스가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밥 딜런도 그 시절에 창창했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