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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탐사] 이참에 없애자, 수학여행

중앙선데이 2014.04.20 03:38 371호 31면 지면보기
졸린 눈을 비비고 연신 하품을 해대며 컴컴한 비탈길을 걸어 오른 토함산. 무거운 발걸음을 하나둘 뗄 때마다 ‘이 짓을 뭐하러 하나’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었다. 하지만 멀리 아래서부터 이불 개듯 차근차근 어둠을 접어가는 일출을 마주하고는 ‘햐~’ 탄성이 절로 나왔었다. 석굴암 방향이 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짓날 뜨는 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았지만, 이런 장관을 매일 보는 석굴암 부처님이 몇 초나마 부럽기까지 했었다(몇 해 전 경주를 다시 찾았을 때 보니 석굴 앞에 건물을 지어 가렸다. 보기에도 답답해 보였지만 부처님이 참 답답하시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지금은 막아놨지만 그때는 석실 안으로 들어가 본존불 주위의 부조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관음상을 비롯한 이름 모를 보살상들을 하나하나 지나며 느꼈던 경외감과, 몰래 슬쩍 스쳐봤던 짜릿한 손가락 촉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내 추억의 슬라이드쇼다.

고교 시절 경주로 수학여행 갔을 때 얘기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참 의미 있는 수학여행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후한 셈을 해봐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뭘 타고 갔는지, 가면서 뭘 했는지조차 기억이 삼삼한 걸 보면 여행이라고 크게 달뜨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내 수학여행 기억은 여관방에 짐을 풀면서부터 시작한다.

천년 고도답게 기와지붕으로 장식됐던 여관은 그럴듯한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 시설은 영 아니었다. 가구 하나 없는 세 평 남짓 온돌방에 예닐곱 명씩 숙소 배정을 받았던 것 같다. 어차피 필요 없는 것이었지만 이불과 요조차 턱없이 부족했다(청결함은 체크 대상도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희희낙락했었지만 그 기분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

난데없는 집합 명령 호루라기.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쪼그려 뛰기, 엎드려 뻗쳐 기합부터 받아야 했다. 그야말로 사고 예방, 탈선 예방용 얼차려였다.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간다. 그 많은 학생을 인솔 교사 몇 명이 관리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처음부터 군기를 꽉 잡아놓지 않고 긴장이 풀어진 채 내버려뒀다간 언제 어디서건 사고가 터질 게 분명한 일이었다.

선생님들의 통제 전략은 효과를 발휘했지만 우리의 수학여행은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별다른 사고 없이 돌아오는 게 목표였다면 성공이지만, 꽉 짜인 통제 속에서 수학도 여행도 없는 그저 2박3일의 불편한 외박에 불과했던 것이다.

모르긴 해도 요즘이라고 이런 모습이 크게 개선됐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교육 효과도, 여행의 재미도 없는 이런 수학여행을 계속 해야 하는 걸까. 그저 내가 학교 다닐 때도 했으니까 지금도, 작년에 했으니까 올해도… 이렇게 관성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나마 석굴암의 감동마저 없었더라면 진작부터 수학여행 폐지론자가 됐을 터다. 하지만 그런 감동을 꼭 수백 명이 모여서(모두에게 같은 감동도 아닐진대) 얼차려(또는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는 다른 수단)를 받아가며 느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싶다. 교육부가 수학여행 참여 인원을 150명 내외로 제한하도록 지침을 내리고 있다지만 하나 마나 한 권고일 뿐이다.

그런 감동을 위해 그 많은 학생이 움직이기엔 우리 사회의 안전사고 위험이 너무 크고 잦다. 학생들이 일 저지르는 사고뭉치이기 이전에 사회가 주범인 사고의 희생자인 경우가 훨씬 많지 않은가. 이번 세월호 참사가 아니더라도 자식을 보내놓고 돌아올 때까지 마음 졸이는 학부모들이 너무나 많은 게 사실이다. 인터넷 숙박 체험활동 폐지 청원에 하루 만에 3만 명이 서명할 정도다.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부담이다. 수학여행 전 두 차례 사전 답사 의무라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그저 관리들의 자기위안용 권고일 뿐이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며 발 뻗고 잠 잘 수 있도록 말이다.

학생들은 배울 거 없고, 부모들은 걱정되고, 교사들은 부담되는 일을 굳이 계속할 이유가 없다. 나아가 이참에 초·중·고교의 수학여행과 수련회, 대학교의 오리엔테이션 같은 학생들의 모든 집체교육 자체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수백 명이 모여서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런 교육이란 집단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에 앞세우는 전체주의의 시대착오적 산물일 따름이자 ‘우리가 남이가’ 식의 고질적 지연·학연주의의 증폭기일 뿐이다. 그런 행사를 가짐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몇몇 소수를 위한 다수의 강요된 들러리 희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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