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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언어 vs 사적 언어

중앙선데이 2014.04.20 03:42 371호 31면 지면보기
지난주 런던도서전에 패널로 참석하며 깨달은 게 하나 있다. 한국 작가들이 해외에선 한국을 대변해서 말하도록 압력을 받는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은 변방의 나라’라는 한국인들의 인식에서 비롯된 듯하다.

실상은 다르다. 한국은 세계 10위권에 드는 출판 시장이며, 싱가포르·중국·말레이시아가 한국문학번역원을 벤치마킹 중이다.

런던도서전에서 한국이 주빈국으로 환대받은 것은 한국에 중요한 마케팅 기회다. 런던도서전이라는 세계적 출판 행사에 한 국가에서 10명의 작가 그룹을 초청받는다는 건 그들의 작품이 전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는 의미다. 한국 문학이 이렇게까지 해외 언론의 조명을 받는 건 거의 처음으로, 한국문학번역원 및 정부의 재정 지원으로 가능했다. 미국 출판사 달키 아카이브를 창립한 존 오브라이언은 행사 기간 중 내가 사회를 본 패널에서 “전 세계를 통틀어 한국처럼 자국 문학을 위해 지원을 넉넉히 하는 나라는 현재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정부 지원은 좋은 번역으로도 이어졌다. 번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다.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건 문장의 재구성이다. 원문의 리듬과 어휘 선택의 속뜻과 함께 작품의 목소리를 간파해야 한다. 번역가 교육 및 지원금이 넉넉히 제공된 덕에 번역의 질이 높아졌다. 이에 비해 훌륭한 문학 번역가들이 주목을 못 받은 건 아쉬운 일이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번역한 김지영씨나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번역한 소라 러셀-김씨 등과 같은 번역가들은 소중한 자산이다.

다시 작가들로 돌아가보자. 런던도서전에 초청된 한국인 작가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점은 뭘까. 국적 외엔 별로 없다. 예술가들은 서로 특징이 다른 사람들이라 섞일 수 없다. 그들을 한 군데 너무 오래 모아 놓으면 서로 충돌해 은유적 의미로 서로에게 멍이 들게 할 수도 있다.

반면 한국 문학의 독특한 목소리를 소중히 여기는 분위기는 노벨문학상 혹은 ‘한국 문학 세계화’(이 말은 너무 자주 들려온다)를 향한 열망에 자리를 내줬다. 문제는 작가들이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한국 문학의 고급 이미지를 ‘팔기’ 위해 10명의 작가들이 한 행사에 모으는 데 성공했다고는 해도 작가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까지 막을 순 없다. “외국어로 번역된 내 작품을 읽는 건 마치 장갑을 끼고 연인을 애무하는 것 같다.”(김영하)

일부 평론가는 고 박완서 작가는 한국 문화에만 특정적인 내용을 다루기에 보편적 매력을 갖지 못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레오 톨스토이부터 밀란 쿤데라까지 위대한 문학은 보편적인 매력을 갖는다. 런던도서전에서 ‘괴리’라고 명명된 패널에서 나와 함께 토론한 신경숙 작가 역시 “내 작품을 읽으면 누구든 자신의 엄마를 떠올린다”고 했다. 작가는 자기만의 사적인 언어를 쓰지만 그것이 작품이라는 터널을 통해 독자에게 보편적 매력으로 닿는 것이다.

한편 한국에 돌아와 세월호 침몰 사고라는 거대한 비극을 마주한 지금, ‘괴리’라는 단어와 ‘사적인 언어’라는 말은 더 아프게 다가온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정부가 사용하는 공적인 언어와 일반 국민의 사적 언어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문학계는 물론 한국을 통틀어 가장 큰 괴리가 생기고 있는 지점이 이 공적 언어와 사적 언어의 괴리인 듯하다. 정부는 발표를 하거나 지시를 내릴 때마다 말을 신중하게 고른다. 정부뿐 아니라 지상파 TV 3사 뉴스를 봐도 그렇다. 지상파 뉴스는 홍보 캠페인처럼 보인다. 그만큼 점잖다는 뜻이다. 반면 온라인에서 사용되는 사적 언어를 보자. 일반 국민은 의심과 분노 그리고 소문의 언어를 여과 없이 쏟아내고 있다. 이런 분노의 언어 뒤엔 애도와 슬픔이 숨어 있다. 이 슬픔을, 이 괴리를 어찌할 것인가.



크리스 리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 『떠도는 집(Drifting House)』(펭귄)으로 데뷔했다. 연세대 언더우드 국제학부(UIC)에서 문학창작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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