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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블랙요원 신상도 공개 … '한국판 리크 게이트'

중앙일보 2014.04.15 02:30 종합 3면 지면보기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수사 결과가 14일 오후 서울고검 청사에서 발표됐다. 이날 검찰은 국정원 대공수사처장 등 국정원 직원 2명을 추가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 증거조작 수사팀장을 맡고 있는 윤갑근 검사장(대검 강력부장)이 수사 결과 발표 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최승식 기자]


리비(左), 플레임(右)
국가정보원이 ‘간첩 피의자의 증거를 조작하려 중국 정부 공문까지 위조했다’는 국제적 오명을 쓰게 됐다. 또 범행을 은폐하려고 동북 3성에서 비밀리에 활동한 요원과 협조자(정보원)들의 신원을 스스로 노출했다는 치명적인 상처도 입었다. 2003년 미국 정부 관리들이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의 신분을 노출한 ‘리크 게이트(Leak Gate)’의 한국판인 셈이다. 리크 게이트는 당초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정책에 반대한 외교관을 궁지에 몰기 위해 벌인 일이지만 이후 사건의 본질보다는 비밀요원 공개의 도덕적 책임을 두고 더 큰 논란을 빚었다.

국회·검찰서 마구잡이 유출
미국, CIA 요원 신분 노출 엄벌
부통령 비서실장도 징역형 선고



 서울중앙지검 증거조작 수사팀(팀장 윤갑근 검사장)이 14일 발표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 수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국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국정원의 무리수는 화교 출신 간첩 피의자 유우성(34)씨가 지난해 8월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시작됐다. 당황한 국정원은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기 위해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베테랑 요원들을 투입했다. 자살을 기도했다 병원에 입원 중이라 조건부 기소 중지된 권모(51·선양총영사관 부총영사 파견) 과장은 1990년대부터 동북 3성에서 협조자(정보원)를 관리해 온 중국통 ‘블랙(비공개) 요원’이었다. 그는 96년 아랍계 교수 위장간첩 ‘무하마드 깐수’를 잡아 보국훈장까지 받은 27년 경력의 베테랑 수사관이다. 일명 ‘김사장’이라 불리던 비밀요원 김모(48·구속 기소) 과장도 2000년부터 14년 동안 중국 칭다오(靑島) 등지에서 사업가로 활동하던 협조자 김모(61·구속기소)씨와 친분을 맺은 뒤 신뢰할 만한 고급 대북 첩보를 수집해 왔다.



 권 과장과 김 과장은 공식 외교경로를 통한 증거 입수가 불가능하자 현지 정보원을 총동원해 조작에 나섰다. 권 과장은 2012년 11월 위조되지 않은 유씨 출입국전산망 컴퓨터 출력물 원본을 중국 관리로부터 직접 빼냈다.



 검사가 지난해 9월 원본의 증거 제출을 반대하자 김 과장이 성명불상의 중국 내 협조자를 통해 허룽시 공안국 문서 위조에 나섰다. 이어 협조자 김씨를 통해 싼허세관 문서를 조작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국정원이 문서 조작을 한 것도 잘못이지만 중국 내 베테랑 요원들과 휴민트(정보원)를 조작에 투입해 노출시킨 것이 더 큰 실책”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국회와 검찰에서 사건 초기부터 국정원 비밀요원의 실명이 공개되면서 불거졌다. 지난 2월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서 선양총영사관에 파견된 이모(48·불구속 기소) 영사가 사건에 개입한 사실이 공개됐다. 이후 국정원이 “비공식 입수”를 시인하면서 협조자 김씨, 김 과장과 권 과장의 존재도 차례로 노출됐다. 국정원은 귀국한 협조자 김씨와 말을 맞춰 검찰에 출석시켰다가 지난달 5일 그가 모텔 벽에 ‘국조원(국가조작원)’이란 혈서를 쓰며 자살소동을 벌임에 따라 조작사실이 들통났다. 권 과장도 지난달 22일 “나는 용도 폐기됐다”며 자살을 기도해 현재까지 병원에 입원 중이다.



 남재준 국정원장 등 고발된 국정원 고위층 수사에 대해 수사팀은 “부국장 이상은 내용을 보고받지 못했고, 일부 전문을 결재한 경우가 있지만 상세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돼 무혐의 처리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검찰과 정치권 일각에서는 “증거조작 보고를 받았느냐는 문제와 별도로 주요 요원들과 휴민트를 노출시킨 데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효식·노진호 기자



◆리크 게이트(Leak Gate)=2003년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전에 비판적이던 조셉 윌슨 전 이라크대사의 부인 발레리 플레임이 CIA의 비밀요원이라고 언론에 신분이 공개된 사건. CIA 비밀요원 신분 노출을 금지한 ‘정보요원신원보호법’에 따라 특별검사 수사로 이어졌고 루이스 리비 당시 딕 체니 부통령 비서실장이 위증과 사법방해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6월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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