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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최고 존엄' 김 자만 건드려도 … 북한 분노조절 장애

중앙일보 2014.04.15 01:00 종합 8면 지면보기
최고 존엄 사수 … 기관총 차고 위협적 수행 지난해 11월 백두산 인근 삼지연군 제991공군부대를 방문한 김정은. 환호하며 뒤따르는 병사들을 기관총으로 무장한 호위무관들이 접근을 막고 있다. [노동신문]


이영종
북한이 분노조절 장애에 빠졌습니다. 단순히 뿔났거나 몽니를 부리는 수준이 아닙니다. 대남 비난에 4차 핵실험 위협, 추가 미사일 발사까지 ‘도발 종합선물세트’가 준비되는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14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하루 전 국방위원회 측의 박근혜 대통령 비난 공세는 그 전주곡인 셈입니다. “임기 중에는 청와대가 산무덤 되고, 임기 후엔 처형의 올가미가 씌워질 것”이란 비방은 저주에 가깝습니다.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애비’라고 비하하고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란 극언까지 가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북한 권력기관이 관영매체로 내뱉은 말이니 실망감이 깊어집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왜 이럴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김정은 유고(有故) 땐 대안 없어 더 민감



그럼에도 ‘최고 존엄’ 훼손 징후 … 김정일 얼굴 잘린 사진 보도 김정은의 인민무력부 사적관 방문을 다룬 지난해 11월 9일자 노동신문 1면 사진. 옆방 벽에 걸린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진의 일부(오른쪽은 확대 모습)만 드러나 있다. 최고 존엄을 다루는 데 금기시되는 편집이다.


이런 극단적 감정표현에 숨겨진 핵심 키워드는 ‘최고 존엄’입니다. 쉽게 말해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은 물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존(至尊)이란 의미죠. 노동신문에는 불난 집에 걸린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구하러 들어갔다 숨진 주민이나 침몰하는 선박에서 초상화를 끌어안고 죽어간 선원을 영웅시하는 미담이 가득합니다. 김정은 체제에서 제일 잘나가는 2인자 최용해 군 총정치국장을 띄우는 선전매체 보도 중에는 “그의 부친(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이 김일성 수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 일화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북한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최고존엄이란 말은 평양에서 발간된 조선말대사전(2007년 7월 판)에는 올라있지 않습니다. 다만 ‘존엄’이란 단어를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가정보원과 통일부에 “최고존엄이란 말을 북한이 처음 쓴 게 언제냐”고 취재해봤습니다. 남북장관급회담 북측 단장이던 권호웅 내각 책임참사가 원조라고 하는군요. 권 단장은 2006년 7월 부산에서 열린 19차 회담 때 “상대 체제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성지와 명소, 참관지를 제한 없이 방문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김일성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에 대한 참배를 요구하면서 최고존엄을 대남 압박의 카드로 쓴 것입니다.



 최고존엄을 내세운 대남 공세는 김정은 체제 출범 후 본격화합니다. 비교적 확고한 권력을 쥐고 있던 김정일 시대와 달리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를 두고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은 “취약한 후계권력에 대한 외부 비난을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지난해 12월 장성택 처형 사태 이후 ‘반당·종파’ 행위가 현실화했다는 우려에다가 공포에 얼어붙은 핵심 간부들의 과잉충성 분위기까지 겹치면서 최고존엄 논란의 파고는 부쩍 높아졌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여기에는 ‘김정은 원수에게 유고(有故) 상황이 닥치면 대안이 없다’는 절박감이 작용한 때문이란 분석입니다. 할아버지 김일성은 유일지배 체제를 다진 1974년 2월 장남 김정일을 후계자로 비밀리에 지명합니다. 김정일은 여러 대안을 검토하다 2010년 9월 노동당 대표자회를 열어 3대 세습으로 마음을 굳힙니다. 27세에 권력을 넘겨받은 김정은의 직계는 갓난아기인 두 딸뿐입니다. 여동생 김여정과 형 정철도 김정은을 대신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김일성 초상화 안고 죽은 선원 영웅화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 때 운구차를 향해 몰려든 주민들을 호위총국 요원들이 차단하는 장면. 방탄헬멧에 전투복을 착용한 이들은 운구행렬이 막히자 군용지프에서 황급히 내려 기관총으로 제압했다. [노동신문]
최고존엄을 사수하려는 북한 당국의 노력은 절박해보입니다. 2011년 12월 갑작스레 숨진 김정일 빈소를 찾은 김정은 곁에는 권총을 찬 경호원이 밀착수행합니다. 기관총을 차고 전투헬멧을 쓴 호위총국 소속 근접 호위무관들이 군부대 방문 등 외부활동에 나선 김정은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김정은에게 다가서려는 주민과 군인들을 군복 차림 경호원들이 필사적으로 밀쳐내는 장면도 자주 보입니다. 대북 정보분석을 하는 관계자는 “김정일 장례식 때 몰려든 주민들로 인해 운구차가 멈춰 섰을 때 북한 당국은 아찔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길이 막히자 군용 지프에 타고 있던 군복 차림의 요원들이 기관총까지 동원해 필사적으로 밀쳐내며 길을 확보하는 장면이 조선중앙TV룰 통해 생생히 중계됐습니다.



  최고존엄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북한의 행보는 당분간 계속될 모양입니다. 이를 면밀히 추적하면 추가 핵실험 같은 도발 시점도 예견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핵·미사일 대북제재에 반발하던 북한은 최근 들어 인권문제에 격앙된 반응을 보입니다. 이동일 유엔 주재 북한 차석대표가 4일 기자회견에서 “우리(북)에 대한 인권 상황 조사를 통해 긴장을 높이고 있다”고 비난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인권조사위(COI)의 활동을 다룰 유엔안보리 논의가 17일로 닥쳤고, 김정은을 기소해야 한다는 국제적 여론이 탄력을 받고 있으니 북한 당국의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쯤 핵실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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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전 "존엄=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위엄”



여기서 잠깐 짚어볼 게 있습니다. 두 달 전 판문점에서 열린 고위급 접촉 얘깁니다. 김규현 청와대 안보실 1차장과 원동연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은 2월 14일 상호비방 중단 등을 담은 합의문을 발표합니다. 서로 상대 체제에 대한 중상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금강산 이산상봉 때만 해도 남북관계는 따뜻한 봄날을 맞을 것이란 예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 달쯤 후 북한은 남한 언론의 김정은 비판을 문제 삼았습니다. 고위접촉 당시 김규현 수석대표는 “당국은 비방중상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민간의 활동은 제한이 어렵다”고 못 박았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언론과 탈북자도 제대로 통제 못하는 무능정권”이라며 비난 수위를 높이고 있습니다. 당국이 민간을 통제할 수 없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다원성을 충분히 이해시키지 못한 때문이죠. 최고존엄이란 잔불을 확실히 끄지 않고 덮어버린 게 두고두고 아쉽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이영종 외교안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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