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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매켄지와 함께한 시간여행

중앙일보 2014.04.15 00:10 종합 31면 지면보기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지난주 뉴욕에 다녀왔다. 인천공항에서 존 F 케네디 공항까지 13시간의 비행시간과 또 그만큼의 시차는 언제나 인내의 한계를 시험한다. 몸을 뒤척이며 가능한 모든 자세를 취해보지만 불편하고 지루하긴 마찬가지다.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다. 책과 함께하는 여행 말이다. 어떤 책을 만나느냐가 관건이지만 성공하면 이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



 『한국의 독립운동』이란 책을 본 적이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 캐나다 기자 프레데릭 아서 매켄지가 1920년에 쓴 책이다. 올해 3·1절 95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가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걸 계기로 그 책을 골랐다. 매켄지는 영국 데일리메일의 극동 지역 순회특파원으로, 러일전쟁과 한국의 의병 활동, 3·1운동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한 언론인이다. 한국사 교과서마다 구한말 의병들의 항일투쟁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사진(사진)을 찍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중 『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이 잘 알려져 있지만 그 못지않게 화제가 된 책이 3·1운동 발발 이듬해에 출간한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이다. 국내에선 『한국의 독립운동』이란 제목으로 오래전 번역됐다. 태블릿에 다운받은 이 책과 함께 모처럼 13시간의 성공적인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다. (두 책 모두 인터넷에서 원문을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역사교육과 영어 공부를 겸해 청소년들에게 일독을 강추한다.)



 매켄지는 열강의 각축 속에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국권이 침탈되는 과정을 먼저 소개한다. 그에 맞선 한국인들의 투쟁을 목격담 위주로 전한 뒤 3·1운동의 발발 과정을 설명하고,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을 고발한다. 특히 일본 헌병과 경찰이 동원한 잔인한 고문 수법이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된다. 대나무와 쇠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여학생들의 옷을 벗겨 살을 담뱃불로 지지고, 엄지손가락을 묶어 매달아 놓고 의식을 잃을 때까지 매질을 하는 등 온갖 고문이 자행됐다. 그는 고문으로 숨진 조선인의 사진을 아는 미국인에게 보여줬더니 “악몽에 시달려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다”고 하더라는 일화도 전한다.



 매켄지는 총과 칼로 한국인을 동화시키려는 일본의 식민통치 방식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비판한다. 한국인은 그런 대우를 받을 열등한 민족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책 곳곳에서 한국인의 문화적 전통과 뛰어난 자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구 학문을 습득하는 젊은이들의 빠른 흡수력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한국인들의 뛰어난 적응력에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또 비폭력·무저항을 앞세운 3·1운동은 폭동이 아니라 평화적 시위였다며 일본의 대응 방식을 규탄했다.



 태블릿을 덮으며 도착한 존 F 케네디 공항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9년 연속 세계 최고 공항으로 선정된 인천공항에 익숙해진 탓만은 아닐 것이다. 맨해튼으로 들어가는 고속도로는 보수공사 때문인지 서행과 지체를 반복하는 차량들로 답답하게 막혀 있다. 누가 버렸는지 모를 커다란 검은색 비닐 쓰레기봉투들이 도로변에 흉물스럽게 널려 있다. 맨해튼의 마천루들은 빛이 바랬고 낡았다. 물가는 살인적이다. 그런데도 계산대마다 늘어선 줄은 좀처럼 줄지 않는다. 손님이 많으면 계산원을 추가로 투입하는 융통성은 보이지 않는다. 계산기는 말썽이고, 계산원은 미숙하다.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할 당시 미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고종은 미국인 선교사 겸 교육자인 호머 헐버트를 워싱턴에 보내 을사조약의 무효성을 알리고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친서를 전하려 했지만 루스벨트는 접수를 거부한다. 그는 ‘미개한 한국 민족은 자치 능력이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훗날 그는 “한국인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나라(일본)가 대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회고했다.



 미국은 더 이상 과거의 미국이 아니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함으로써 중국을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미국의 힘은 쇠퇴하고 있다. 그 바람에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없이 일본은 착착 재무장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지금 단호하게 행동하면 비록 충돌이 일어나더라도 그 위험은 작다. 하지만 지금 약하게 행동하면 틀림없이 한 세대 내에 극동에서 대전(大戰)이 일어날 것이며, 그 부담의 상당 부분은 미국이 져야 할 것이다.” 매켄지의 경고는 태평양전쟁으로 정확하게 현실이 됐다. 그 경고는 지금도 유효한 것인가.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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