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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둘러 말하는 러브스토리 가슴 한켠이 아련하고 뜨끈

중앙선데이 2014.04.12 15:53 370호 21면 지면보기
나이 들수록 두려워해야 하는 건 편견으로 마음을 닫는 일이다. 내 취향은 이게 아냐, 저 사람은 저 예술 작품은 나랑 맞지 않아, 하는 옹졸한 마음들이 새로운 세계에 눈뜨는 일을 막는다. 자신만의 단단한 세계 안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도 그렇다.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일은 사실 보물 상자를 몰래 열어보는 듯한 희열이 있는데도 말이다.

컬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감독 웨스 앤더슨의 미학

웨스 앤더슨(작은사진) 하면 유난히 화면의 대칭에 집착하고, 원색과 파스텔톤의 정교한 세팅은 비현실적이며,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뜬금없는 캐릭터를 내세우기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의 음침한 분위기에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분이라면, 겨울 내내 닫아뒀던 창을 열 듯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움츠러들었던 몸이 창가에서 봄 기운 덕에 나른하게 퍼지는 듯한 훈훈함을 느낄지도 모를 테니.

1990년대 말 미국 언론이 ‘새로운 뉴웨이브의 시대’가 열렸다면서 흥분했던 폴 토머스 앤더슨, 알렉산더 페인, 스파이크 존스, 크리스토퍼 놀런 같은 일군의 감독들 중에서도 웨스 앤더슨의 세계는 유난히 독특했다. 다른 이들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아카데미를 휩쓰는 주류 감독들로 성장한 15년쯤 뒤에도 아직 그는 단단한 자신의 껍질을 깨지 않고 있어 보인다.

나는 그의 두 번째 영화 ‘러시모어’(한국 개봉 제목은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1999)를 보고 대번에 사랑에 빠졌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만의 세상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그의 영화는, 애정을 되새기면서 마음먹고 보면 또다시 열광하게 되면서도, 하루 저녁 피로를 풀 오락거리로서는 선뜻 선택되지 못했다.

그러나 편견의 문지방을 살짝 넘어서 만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지성과 오감, 눈썰미를 자극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관습적인 미국 영화 혹은 유럽 영화 어느 쪽도 아닌 색다른 즐거움, 에른스트 루비치와 막스 오퓔스, 히치콕 같은 클래식 영화의 흔적과 감독 자신이 영감을 얻었다는 문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향취, 그리고 플랑드르파 화가 한스 홀베인과 에곤 실레의 패러디 작품들을 찾아내는 흥미진진함, 심지어 리본으로 정성스럽게 싼 분홍 마카롱 상자의 세심함까지. 두 시간의 완벽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라고나 할까.

감독 역시도 마음을 점점 열어 가는 듯했다. 전작에서는 볼 수 없는 액션, 총싸움, 추격전, 탈주극, 절벽의 일대일 결투까지 각종 양념을 뿌리고, 살인과 배신과 전쟁과 섹스까지를 총망라한 덕분에 즐거움은 쉴 틈이 없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그가 집착하는 시각적인 세계, 러시아 인형 마트료쉬카처럼 이야기가 새록새록 나오는 중층 구조, 유난히 기이한 캐릭터들에게 관심을 빼앗기지 않을 만큼 그 속에 있는 사랑 이야기가 더없이 로맨틱하고 따뜻했다는 점이었다. 지성과 감성이 딱 맞아 떨어지는 균형감각 덕분이다.

호텔의 로맨틱 가이인 주인공 구스타보는 팔십 노인 틸다 스윈턴을 비롯한 호텔 고객들과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사랑을 나누며 고객을 관리하는 속물이면서도 혼자 댄디한 척, 도덕군자인 척은 다하는 뻔뻔한 제비 같은 남자다. 그렇지만 격렬하거나 치열한 사랑의 감정, 뼈와 살이 부딪치는 정염이 아니라 어른 같지만 아이 같은, 근엄하지만 어리숙한 낭만이 있다. 세대를 뛰어넘는 호텔 보이 무스타파와의 우정도 마찬가지다.

세세한 감정의 리얼리티로 사랑과 우정을 말하는 게 아니라 에둘러가면서 능청 떨고 은근히 말하는 그의 러브스토리는 가슴을 아련하게, 그러나 은근하고 뜨겁게 흔든다. 과거엔 한때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노라고, 그러나 그것은 (주인공 구스타보의 불행한 결말처럼)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노라고, 또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영화 속에서 세대를 전해 내려가며 아름다운 소설책으로 남은 것처럼 또 우리의 시선에 의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거라고.

영화는 그렇게 감성을 자극했다. 생각해보면 기묘한 이야기나 집착적인 대칭 화면 속에서도 십여 년간 그가 작품의 가장 중심에 놓고 있었던 것은 그런 보편적인 사랑과 우정이었던 것 같다. 그 따뜻한 울림은 충분히 맛볼 만하다. 그리고 이 봄에는 그의 영화처럼 달콤하지만 씁쓰레했던 옛 기억들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겨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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