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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 콩티, 30대 여인의 완숙함 물씬

중앙선데이 2014.04.12 16:00 370호 23면 지면보기
로마네 콩티와의 첫 만남, 벌써 오래된 기억이다. 그러나 그 기억은 너무 생생해 마음속에 그대로 화석이 되어 있다. 2000년대 초반, 10년 정도의 와인 여행 끝에 프랑스 명가 편을 쓰기 위해 마지막으로 방문한 와이너리가 바로 로마네 콩티였다. 보통 약자로 DRC(Domaine Romanee Conti)라고 쓴다. 화창한 가을 오후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DRC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던 느낌이 생생하다.

김혁의 와인야담 <12> 내 기억 속 최고의 맛

오너는 내게 셀러 마스터를 소개해 주었고, 그는 내게 콩티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밭을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와인 여행을 온 듯한 50대 일본인 10여 명이 있었는데 그중 한 남자가 갑자기 콩티 포도밭으로 올라가 소변을 보는 것이 아닌가. 일행들은 그 광경을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셀러 마스터가 고개를 흔들었다. ”문화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인간들이 하는 짓이란….” 이런 기분 나쁜 상황에서도 마스터는 나를 오래된 콩티 셀러로 안내했다. 13세기 수도원의 지하에 있어 입구가 꼭 피난처 같지만 일단 계단을 내려가면 조용하고 아늑하면서 정갈해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그 속에 DRC가 만드는 6개의 그랑 크뤼 오크통들이 놓여 있었다.

“오크통 몇 개만 골라 시음시켜 줄까 아니면 모두 할까?”라는 질문에 나는 “저 시간 많아요”라고 했다. 그는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고 하나씩 천천히 시음시켜 주었고, 드디어 콩티 바로 전 라 타슈(La Tache)까지 맛보았다.

여기까지 시음한 것만도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사실 내게 큰 감회는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네 콩티를 시음하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그 향기부터 달랐다. 혀를 휘감는 맛이 이전에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최고의 맛이었다. 나는 3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는 들꽃이 만발한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었다. 얼마 전 아기를 낳아 고통이 무엇이고 희열이 무엇인지 느껴본 여인. 이제 바람 앞에서 끝없는 자유를 느낀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부드럽게 포옹을 하며 절대적 충만감을 느낀다. 느낌이 바로 그랬다.

얼마 전 특별한 모임에서 로마네 콩티를 마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10년 전 서로 사인한 와인 병을 오픈하는 자리였다. 상태를 확인해 보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95년산이었는데 처음에는 약간 닫혀 있었으나 잠시 후 그 특유의 다양한 향기를 뿜어냈다. 산미가 많이 느껴졌지만 뒤쪽으로 타닌도 살아 있어 더 오랫동안 숙성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시기에 최상의 적기는 아니었지만 향은 그 어느 와인보다 품위가 느껴져 빠져들게 만들었다.

한 병을 오픈했을 뿐인데 방안은 이미 콩티 향기로 가득했다.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린 분들의 얼굴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잊었으리라. 한잔을 음미하는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가득했고 감동으로 행복한 모습이 역력했다. 한 병의 술이 많은 사람에게 이 같은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명품 와인의 힘 아닐까.

세월이 많이 흘러도 오늘 참석한 분들은 자주 또는 가끔 이 순간의 기억을 되뇔 것이다. 나는 처음 마신 콩티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느꼈었는데 이분들은 누구를 느끼셨을지 궁금하다. 설마 집에 계신 마나님을 느끼신 것은 아닐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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