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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이 할 서비스에 정부 뛰어드는 순간 ‘스텔스 규제’

중앙선데이 2014.04.12 23:47 370호 4면 지면보기
국토교통부가 만든 ‘브이월드’가 보여주는 3D지도 화면. 3D로 구현한 그래픽 품질은 좋은 편이지만 축소와 확대, 각도 조절 등 사용자 환경(유저 인터페이스)은 불편한 점이 많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9 버전을 쓰다가 10 버전으로 자동 업데이트가 됐는데 시스템이 멈춰버렸어요.”

갈길 먼 정부 3.0과 규제개혁

인터넷 부동산 정보서비스 사이트 ‘화이트버드(www.whitebird.co.kr)’를 운영 중인 고석주 대표는 브이월드 얘기를 꺼내자 화부터 냈다.

구글맵 기반으로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던 고 대표는 정부가 3D 지도 시스템을 제공해준다는 말에 브이월드 기반으로 바꿨다. 하지만 브이월드를 사용하면서부터 크고 작은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인터넷 브라우저 업데이트만으로 시스템이 다운되는 일을 겪었을 땐 기도 차지 않았다고 했다.

“구글맵이 유료화되면서 브이월드로 갈아탔는데 이후부터 사업은 사실상 접었습니다. 복잡한 플러그인을 깔아야 하고 익스플로러가 아닌 크롬, 파이어폭스 같은 인터넷 브라우저에선 제대로 돌아가질 않으니 고객들이 찾을리 있나요.”

고 대표는 “구글맵 기반일 때에는 기본 지도 위에 원하는 정보를 쉽게 올릴 수 있었는데, 브이월드는 워낙 복잡한데다 사용방법도 어려워 유지·관리하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지난해 11월 ‘1000억원 들인 브이월드가 민간에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한 언론의 보도가 나오자 국토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보도자료를 통해 “서비스 시작 후 1140여 개 민간기업이 오픈데이터(API를 지칭)를 내려받았으며, 현재 170개 기업이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개발 중에 있다”고 주장했다. 국토부는 이 보도자료에서 대표적 서비스 사례로 ‘화이트버드’ 사이트를 거론했다. “3D와 지적도를 연동한 부동산 지도 서비스(화이트버드)의 경우, 최근 3개월간 1만9000여 건의 접속이 이뤄져 신산업 영역을 구축 중”이라는 것이었다.

고 대표는 “그런 보도자료가 나온 것도 몰랐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1000억 들인 브이월드, 민간엔 무용지물
정부는 브이월드 구축을 위해 지난 10년 동안 지리정보 데이터 통합작업을 해 왔다. 2011년 이후에만 데이터 수집과 시스템 구축에 270억원을 투입했다. 업계에선 지금까지 투입된 예산이 1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국토부는 올해에도 3D 지도 서비스 예산으로 223억원을 배정한 상태다.

정부가 브이월드 시스템을 구축하고 보급하느라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붓는 사이 국내 GIS(Geographic Information System·지리정보시스템) 업계는 고사 위기에 몰렸다. 한국공간정보통신에 이어 지오매니아가 지난 2월 기업회생을 신청했고, 코스닥 상장업체였던 선도소프트는 매각돼 업종을 전환했다. 역시 코스닥에 상장했던 지노시스템은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GIS 업계에선 브이월드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다. ‘원 지리 데이터는 제공하지 않고, 지도 서비스를 하고 싶으면 정부가 만든 브이월드만 이용하라’는 식으로 사실상의 규제를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중소 GIS업체인 A사의 3D지도 개발팀장인 윤관현(36·가명)씨는 “군부 독재정권식 개발 마인드가 정부와 공무원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고 말한다.

“민간 영역은 역량이 안 되니까 우리가 국가예산을 들여 만들어주면 민간에서 잘 쓸 것이라는 식의 마인드에서 시작된 거죠.”

윤 팀장은 “부동산이나 배달업체 같은 초보적 서비스에선 문제가 없지만 GIS 기반으로 ‘돈 되는’ 사업을 하려는 업체는 정부가 만들어 제공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가공되지 않은 로(raw)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GIS업체 B사의 정규호(46·가명) 대표는 “보여주기 서비스와 성과주의, 전형적인 공무원 마인드가 만들어낸 재앙”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3D 지도는 신기하지만 그것뿐”이라며 “업계가 필요한 건 이런 게 아니라, 실질적인 데이터다. 애플리케이션(응용 프로그램)이나 시스템 개발은 민간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는 원 데이터를 제공하고 공정 경쟁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지, 막대한 세금을 써 가며 민간이 할 일을 하느냐”고 지적했다.

자체 지리정보 데이터 구축 작업을 하고 있는 C사의 이모(47) 대표는 “결국 브이월드는 출구전략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글이 제공하는 API 환경에선 어느 시스템에서든 쉽게 원하는 서비스를 올릴 수 있어요. 하지만 브이월드는 가입해서 인증받고 새로 설정해야 하고, 플러그인 설치해야 하고 인터넷 브라우저 버전이 바뀌면 인식도 안 됩니다.”

이 대표는 “민간이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다면 100% 망했을 것”이라며 “매년 유지·보수, 업데이트에만 수십억원이 들어갈 텐데 정부가 이걸 유지한다는 건 난센스”라고 말했다.

정부가 서비스까지 하려다간 시장 걸림돌
전문가들은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공공데이터를 민간이 자유롭게 활용하도록 둬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공기업이나 자회사를 만들어 직접 서비스까지 하면 서비스의 질은 떨어지고 시장은 교란돼 규제나 다름없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무역정보중계가 대표적이다. 무역정보중계 사업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의 한국무역통신(KTNET)이 독점해 왔지만, 2011년 관세청이 통관물류정보시스템(KCNET)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중복 서비스를 하고 있다.

독과점의 폐해를 막고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업계에선 산업부와 관세청이 힘겨루기를 하는 사이, 무역업체의 혼란만 가중됐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정부가 직접 시장의 플레이어로 뛰어들거나 관련 산업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규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은 기상 정보, 특허 정보 등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공공데이터의 거의 전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다.

김진형 공공데이터전략위원장은 “정부의 경직된 사고가 시장에서 새로운 서비스와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정부가 축적해 온 공공데이터를 민간에서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게 ‘정부 3.0’의 취지이고, 산업계의 발전을 가로막는 잘못된 규제를 없애자는 게 규제개혁의 목표인데 오히려 정부가 걸림돌이 돼서야 되겠느냐”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브이월드 서비스의 경우에도 이제 정부가 엑시트 플랜(Exit Plan·출구전략)’을 생각해야 한다”며 “민간기업으로 일부 사업을 양도해 개발비를 회수한다든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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