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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로드 매니저 출신 음악저작권협회장 윤명선

중앙일보 2014.04.12 00:16 종합 14면 지면보기
윤명선 한국음악저작권협회장은 홍길동 같은 삶을 살아왔다. 가수·매니저·음반제작자·큐레이터·작곡가 등등. “직원 180여 명의 협회를 책임지고 있으니 협회장 임기 4년을 마치면 사업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윤명선 회장의 지급 내역서를 공개합니다.’

협회장 맡고 본인 저작권 수입 공개
"돈이 투명해야 조직 잘 돌아갈 것"
장동건·박진영 등 뒷바라지 생활
뒤늦게 작곡에 도전해 인생역전
해군홍보단서 제대로 음악 배워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홈페이지(komca.or.kr)에 최근 뜬 안내문이다. 올 1~3월 윤명선(47) 회장이 받은 저작권료 내역이 실렸다. 3월 936만9426원, 2월 802만7406원, 1월 873만8062원이다. 윤 회장이 발표한 180여 곡에 대한 방송·노래방·전송(다운로드) 등의 사용료 합계다. 직장인으로 치면 월급명세서다. 민감한 개인정보다. 그는 왜 이런 강수를 둔 걸까.



 - 남들 앞에 벌거벗은 꼴이다.



 “못 밝힐 이유가 없다. 예전에 협회 임원이 되면 돈을 더 많이 챙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만큼 의구심이 컸다. 지난 2월 취임 당시 공약했던 사항이다. 제 월급도 30% 깎았다.”



 - 회원이 1만7000여 명이다. 이 정도 액수면 상위 몇 %에 들까.



 “글쎄, 15% 안팎? 잘나갈 때는 월 1억원 가까이 받은 적이 있다.”(참고로 2013년 저작권 수입이 많은 작곡가는 박진영(약 12억원), 조영수(약 10억원), 테디(약 9억원) 순이다.)



 - 후속 조치도 있나.



 “협회 1년 수입이 1200억원가량이다. 돈을 어디에 썼는지 자세한 내용을 한 달 후쯤 공개한다. 저작권협회는 영리단체가 아니다. 회원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한다. 그래야 작품활동에 도움이 된다.”



 윤 회장의 말을 뒤집으면 협회가 불신을 받아왔다는 얘기다. 음악저작권협회는 작곡·작사·편곡가들의 저작권을 넘겨받아 그 수입을 회원들에게 나눠주는 단체다. 올해로 창립 50년을 맞았다. 그간 일부 임원진의 과다 배분, 불투명한 회계 등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말 제2의 신탁단체(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를 승인하기도 했다.



 - 6월부터 경쟁체제에 들어간다.



 “음악인을 위한 길이라면 나쁠 게 없다. 6월부터 협회가 회원들에게 받는 수수료를 현재 12~14%에서 9%로 내린다. 작가들에게 25억원 정도가 더 돌아갈 것으로 본다.”



 윤 회장도 작곡가 출신이다. 2004년 장윤정의 출세작 ‘어머나’가 대표곡이다.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로 시작하는 ‘어머나’는 한 수 아래 음악으로 폄하되던 한국 트로트에 새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사실 협회장을 맡을 뜻이 없었다”고 했다. “당신이 바지런하니 한번 뛰어달라”는 주변 선후배들의 권유가 컸다고 한다. 그만의 독특한 경력도 한몫했다. 산전수전공중전, 나이는 40대 중반이지만 제법 굴곡진 삶을 살았다. 로드매니저에서 시작해 스타 작곡가로 인생역전을 일궜다.



 - 말이 매니저지 허드렛일이다.



 “군 제대 후 잠잘 곳이 필요했다. 형에게 돈 5000만원을 받아 제 개인 음반을 냈는데 다 까먹고 말았다. 호구지책이 필요했다. 가수 이주원, 배우 장동건의 손발이 됐다. 운전하고 심부름하고…. 하루 20시간 일한 것 같다. 월급 30만원에서 27만원을 월세로 냈다.”



 - 설움도 컸을 텐데.



 “그건 기본이다. 누구나 겪는 공통분모다. 배가 고파 사장님 집에 있는 고등어를 몰래 먹다가 엄청나게 욕을 먹은 적도 있다. 가수 김신우, 방송인 김승현 매니저를 거쳤다.”



 - 그러다 박진영을 만났다.



 “정신을 차렸다. 남들보다 잠이 적은 편이다. 6년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다. 운도 좋았다. 사업가인 진영이 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매달 업무보고를 하면서 꼼꼼한 일 처리와 성실한 자세를 익혔다.”



 - 박진영은 어떤 스타일인가.



 “그의 춤을 보면서 예술의 동선을 알게 됐다. 진영이 몸의 선은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춤의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일제 강점기 무용가 최승희처럼 말이다. 예술은 ‘운명의 신’을 만나야 한다고 본다.”



 - 작곡에 본격적으로 도전한 때는.



 “2001년 심수봉의 ‘진실 그 사랑’부터다. 장나라의 ‘물망초’, 보보의 ‘청혼’을 썼다. 조용필의 ‘빛’, 이승철의 ‘서쪽 하늘’, 이루의 ‘까만 안경’, 윤미래의 ‘떠나지마’, 김장훈의 ‘허니’, 슈퍼주니어- T의 ‘로꾸거’ 등이 인기를 끌었다.”



 - 그래도 ‘어머나’를 필적할 수 없다.



 “트로트보다 발라드를 많이 만들었다. 저작권료도 그쪽에서 많이 나온다. ‘어머나’는 주현미·송대관·엄정화 등 가수 7명에게 거절당했던 곡이다. 주인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저와 장윤정의 오늘이 있게 한 노래다.”



 윤 회장의 출발은 가수였다. 1987년 경기대 행정학과 2학년 때 MBC ‘신인가요제’에서 자작곡 ‘크리스탈’로 장려상을 받았다. 음악 하는 선배에게 손가락으로 박자 만드는 법을 간단히 익히고 이틀 만에 빚은 곡이다. 그가 노래와 연을 맺은 첫 단추이자 ‘운명’이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된 배경이다. 삶이란 계획대로, 시간표대로 진행되는 게 아닐 수 있다는….



 - 작곡을 전공하지 않았는데.



 “환경은 불우했지만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보통 5분 안에 곡을 완성한다. 음악은 흥이다. 논리가 아니다. 대위법·화성학 등 전문용어는 그 다음 문제다. 제 주변에 음대 출신은 거의 없다. 클래식·국악은 몰라도 대중음악은 특강 정도 들으면 된다. 나머지는 인생에서 배우는 거다.”



 - 얼마나 힘들게 컸나.



 “ 아버지가 자유분방하게 사셨다.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방황을 많이 했다. 공부와 거리가 멀었다. 그때 경험이 창작의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음악은 학력·지연·연륜과 관련이 적다. 그래서 다른 장르보다 경쟁력이 센 것 같다. 신인가요제에 나간 것도 등록금 마련 차원이었다.”



 - 그때 떨어졌다면.



 “얼떨결에 붙었다. 탈락했다면 노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디션을 보고 들어간 해군홍보단에서 음악을 제대로 만났다.”



 - 해군홍보단이라니.



 “당시 해군홍보단은 최고의 음악학교였다. 정원이 적어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봄여름가을겨울·빛과소금·유희열·사랑과평화 등이 이곳 출신이다. 가수 김건모·추가열, 개그맨 김용만·심현섭, 방송인 지석진 등과 함께 지냈다. 베이스·기타 등 악기별 전공자가 있었다. 선임자로부터 수준 높은 음악을 접하게 됐다.”



 - 공연도 많이 했겠다.



 “군부대는 물론 외딴 섬마을을 많이 방문했다. 길이 100m 배에서 한 달 동안 생활하기도 했다. 바다가 나의 강의실이었다. 피보다 붉은 황혼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울랄라세션이 다시 불러 주목받았던 ‘서쪽 하늘’에 그 감성이 배어 있다. 지금도 신에게 감사하는 대목이다.”



 - 신을 믿나. 기독교 신자인가.



 “종교 문제가 아니다. 음악은 신의 허락이 없으면 나오지 않는다. 2001년 세계도자기엑스포 조형물, 2002년 오송국제바이오엑스포 상징물을 제작하는 등 미술 쪽에서도 일한 적이 있는데 예술은 뭔가 내려받아야(다운로드) 하는 것 같다.”



 - 처음으로 돌아가서 수입 공개는 ‘쇼잉(showing)’이 아닌가.



 “가진 것 없이 시작했다. 음반을 제작하며 철저히 망하기도 했다. 이후 산을 찾게 됐다. 설악산·지리산·한라산만 350번 넘게 갔다. 산을 타며 물질에서 다소 자유롭게 됐다. 뭐가 잘났다고 과시를 하겠나. 돈은 투명상자에 넣어야 한다. 그러면 협회도 잘 돌아갈 것이다.”



 - 음악팬들에게 하나 약속한다면.



 “저작권이 강화되면서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사라졌다. 가게에서 음악을 틀지 않는 것이다. 세밑이 더 쓸쓸해졌다. 저작권이 소멸된 캐럴을 골라 새로 녹음하고 널리 보급할 생각이다. 심장이 뛰는 연말이 기대된다.”



별명 ‘경옥고’ … 무명 매니저의 생존법



“어이, 경옥고, 한 병 가져와볼래.”



 “예. 여기요.”



 무명의 매니저 시절, 윤명선씨의 별명은 한방음료 ‘경옥고’(현재 단종)였다. 자신의 얼굴을 알리려 24시간 방송 3사의 문턱을 넘어다니던 20여 년 전, 윤씨는 1년 동안 경옥고를 끼고 다녔다. 사이다 한 병에 300원 하던 때, 그는 1100원짜리 경옥고를 들고 방송사 PD·작가들에게 다가갔다. 연예계 풍토도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 방송사는 매니저들에게 ‘갑 중의 갑’이었다. 방송을 타야 노래를 알리고, 히트도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PD들이 밤샘을 자주 하잖아요. 쉽게 접근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생각한 게 건강음료였죠. 값은 비쌌지만 일종의 차별화 전략이랄까요.”



 그에겐 돈이 없었다. 아는 선배에게 목돈을 빌렸다. 오전 6시30분에 방송사로 출근해 알든 모르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많게는 하루에 500병을 돌린 적이 있다”고 기억했다. “돈이 많이 들었겠다”고 물었더니 “그만큼 절박했다. 매니저로 빨리 커서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를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수천만원은 썼다”고 했다.



 소문이 퍼졌다. ‘일 열심히 하는 매니저’라는 말을 듣게 됐다. 1994년 박진영 측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1집 ‘날 떠나지마’로 정상에 올랐던 박진영은 새 매니저를 찾던 중이었다. 윤씨는 이후 6년 동안 박씨와 함께했다. JYP엔터테인먼트 총괄매니저로 뛰었다. 덕분에 돈을 모으고, 연예계 생리도 꿰게 됐다.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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