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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남자가 스포츠에 열광할 때

중앙일보 2014.04.12 00:10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형경
소설가
2002년 월드컵 경기를 기억한다.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선수들을 응원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우리 선수들의 경기 실력은 감탄스러웠고 승리감은 도취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붉은색 티셔츠를 입은 군중이 흥분 상태에서 도심을 치닫는 광경을 보면 걱정스러운 마음이 되곤 했다. 당시에 입 밖에 내어 말했다면 몰매를 맞았을 게 뻔하고, 지금도 말하기가 조심스러운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나쁜 정치인이 우민정책을 쓴다면 저런 것을 원할 것이다. 휩쓸리는 군중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기는 얼마나 쉬울까. 실제로 당시 군중들은 일탈의 아슬아슬한 경계까지 치달았다.



 남자들은 누구나 스포츠에 열광한다. 스포츠가 감정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충실히 억압해 둔 감정을 남자들은 스포츠라는 통로로 표출한다. 직접 경기에 참여할 때뿐 아니라 다만 관전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종류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관중석에서 목청껏 소리치거나, 소파에서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 중계를 보면서도 열정, 경쟁심, 기쁨과 분노 등을 맘껏 표현한다. 그런 장치가 있기 때문에 가정이나 직장에서 경험하는 위험한 감정들을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다. 상사에게 깨져서 화가 난다기보다는 응원하는 프로 야구팀이 계속 져서 기분이 나쁘다고 말하면 안전하다. 아내와의 의견 대립에서 참은 화는 권투 중계를 보며 욕설을 내뱉는 방식으로 내보낸다. 남자들은 스포츠가 내면 감정들을 은밀히 처리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대중들이 열광한 스포츠 종목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흥미롭다. 1970년대까지 텔레비전에서는 권투 중계가 흔히 보였다. 선수들이 직접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는 광경을 보며 남자들은 열광했다. 공격성과 분노의 감정을 담아 더 힘껏 펀치를 날리라고 응원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축구나 야구 경기가 자주 중계됐다. 응원하는 이들은 권투 경기 때보다 덜 폭력적이면서도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하는 것으로 보였다. 우정과 충성심, 환희와 실망감 같은 것. 열광하는 스포츠 종목 변화는 곧 사회 구성원의 마음을 읽는 척도로 보인다. 최근에는 남자들이 김연아 선수의 피겨 스케이팅 경기에 열광한다. 새벽 경기를 보느라 잠을 못 잤다면서 몽롱한 낯빛을 하거나, 가녀린 몸으로 애쓰는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중에 결과만 확인한다고 말한다. 남자들은 이제 스포츠를 통해 사랑과 염려의 감정을 경험하는 듯하다.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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