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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장토론 후 쏟아진 규제 개혁 건의 1547건 … 무슨 사연 올렸나

중앙일보 2014.04.07 00:44 종합 8면 지면보기
“과거에는 구직자가 새벽에 와서 사무실에 대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젠 통신이 발달해 전화와 인터넷 상담으로 충분합니다. 넓은 공간은 불필요하니 면적 제한 규제(33㎡ 이상)를 풀어주세요.”(직업소개소 운영자)


"직업소개소 사무실 면적은 왜 따지나"
"원산지 증명서 꼭 빨간 도장 찍으라니"

 “흡연구역을 출입구 10m 떨어진 곳에 지정하도록 한 규정은 비현실적입니다. 10m 밖이면 대로변이거나 다른 가게 땅이거든요. 흡연부스 설치를 허용해 주세요.”(술집 주인)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혁신 끝장토론’을 주재한 지난달 20일부터 정부 규제포털에 규제완화 건의가 봇물 터진 듯 밀려들고 있다. 회의 당일부터 지난 4일까지 불과 보름 사이에 1547건이 불어났다. 이 가운데 543건은 지난달 3일부터 청와대가 공식 홈페이지에서 운영하고 ‘규제개혁 신문고’를 통해서도 동시에 접수된 것들이다. 1547건은 지난 5년3개월 동안 규제개혁위원회에 접수된 전체 건의(3497건)의 절반에 육박하는 규모다. 규제완화 건의는 2009년 1월 1일 접수가 시작됐지만 그동안엔 하루 평균 한 건이었다.



 그러나 지난 1월 28일 규제포털이 개설되고 끝장토론을 통해 포털 개설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불합리한 규제를 풀어달라는 요구가 분출하고 있다. 끝장토론 이후 새로 접수된 1547건을 본지가 전수조사한 결과 생활 속 규제가 곳곳에서 국민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 접수된 규제 건의를 피규제자 입장에서 유형별로 나눈 결과 전체 1547건 가운데 생활 속 규제는 667건으로 조사 대상 가운데 45%에 달했다.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내 주택 건축 제한, 교육 관련 인허가, 자동차 검사, 병역 관련 검사 절차 같은 규제가 삶의 현장 곳곳에서 국민 생활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자영업자 규제가 411건으로 28%였다. 기업 규제는 211건, 투자 규제는 186건 순이었다. 조사 대상 가운데 규제와 무관한 건의는 분류에서 제외했다. 기업 규제 관련은 평소 경제단체를 통해 건의되면서 상대적으로 적다. 이창수 국무조정실 규제총괄정책관은 “규제포털에도 기업 관련 규제완화 건의가 들어오지만 개인이나 자영업자 차원에서 평소 느끼고 있던 불합리한 규제완화 요구가 폭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큰 특징은 대못 규제는 아니지만 국민 생활에 손톱 밑 가시 같은 규제가 많다는 점이다. 이들 규제는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국민 생활을 어렵게 하는 규제는 지방에서 나타났다. 전북 비안도·두리도 주민 495명은 지방 규제의 대표적인 피해자들이다. 이들은 여객선 대신 고깃배로 위험하게 뭍으로 드나든다. 그 배경에는 새만금 방조제·매립지의 행정구역 편입을 놓고 12년째 계속되고 있는 군산·부안의 대립이 얽혀 있다. 항구 소유자인 정부가 행정구역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객선 운항 허가를 해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공인인증서는 군에 들어갈 때도 넘기 어려운 장애물이다. 병역 신체검사 사전예약을 할 때가 그런 경우다. 신체검사를 받으려면 공인인증서로 병무청 사이트에 접속해야 하는데, 인증서가 없는 경우도 많아 예약에 불편을 겪는 사례가 다반사다. 상공회의소가 발급해 주는 ‘원산지 증명서’에 빨간색 인장이 찍혀야 원본으로 인정받는 관행도 완화 대상 규제로 꼽혔다. 이 증명서는 온라인으로만 출력하게 돼 있다. 따라서 컬러프린터가 필요하다. 이 문제를 제기한 한 수출업자는 “한 푼이라도 경비를 아끼며 수출하고 있는 회사로서 서류 한 장을 뽑기 위해 컬러프린터를 갖추는 것은 낭비”라고 지적했다.



 건의가 모두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창수 정책관은 “일반화가 어려운 개인 민원 성격이 있다고 소관부처에서 판단하면 해당 사항이 없다고 안내하고 있다”며 “권익과 관련된 것은 국민권익위원회로 보내 처리한다”고 말했다. 전체 건의 중 15%가량은 이런 식으로 걸러낸다. 그래도 업무가 폭주하면서 국무조정실은 7일부터 산업통상자원부·국토교통부·환경부·보건복지부·중소기업청에서 긴급 인력지원을 받기로 했다. 접수된 건의는 14일 이내에 담당 부처 처리가 원칙이고,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3개월 이내에 소명하도록 했다.



세종=김동호·이태경·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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