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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의 중국 읽기] 당(唐)이 대당(大唐)인 이유는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2014.04.03 11:31
♣ 둔필승총(鈍筆勝聰)이란 말이 있다. 무딘 붓이 총명함보다 낫다는 이야기다. 책을 보고 며칠 지나면 알갱이는 흩어지고 잔상(殘像)만 남는다. 그래서 몇 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 내용을 공유하고자 한다.



<제8화>『중화를 찾아서』 (2010년 10월, 余秋雨 지음, 미래M&B)



♨ 제목이 어째 중화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내용은 그 반대다. 당(唐)나라가 왜 대당(大唐)이라고 불리는가.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위치우위는 말한다. 중화주의라는 편협한 시각에 머물지 않고 여러 민족과 여러 문화가 어울려진 시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책은 볼수록 더 느낌을 주는데 이 책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중국 문화 전반에 대한 위치우위의 시각을 그의 맛깔스러운 글 솜씨를 통해 보는 것도 한 즐거움이겠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치열한 고민을 엿보는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한 지식인의, 한 문화인의 정신적 분투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갖게 된다. “가을바람이 불면 모든 잎이 떨어지기 마련이니, 굳이 마지막 떨어지는 단풍잎을 본보기로 삼겠는가? 흰 눈이 녹기 시작하였는데, 어찌 처음 내리는 봄비를 탓하겠는가?”라는 대목은 두고두고 되뇌고 싶다.



☞ “역사의 기점은 항상 무더기채로 남겨진 자료이지만 종점은 매 세대의 깨달음이다” (11쪽)



☞ “마오쩌둥은 생명이 거의 마지막에 달했을 즈음에 2천여 년 전의 제자백가 가운데 양가(兩家)를 골라 일일이 포폄하고 정신문화의 유언으로 삼았다고 한다…삶의 마지막 시간에 2천여 년 전의 정신 가치세계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장개석은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간단하다. 그는 유가 전통을 반드시 지켜야 할 문화로 간주했으며, 특히 왕양명(王陽明)을 흠모했다” (21쪽)



☞ “세계적으로 다른 문명 제국들이 원정을 통해 상대의 문명을 사로 훼손한 것과 달리, 역대 중국인들의 내전이 그처럼 격렬했던 것은 오로지 화하문명(華夏文明)의 정통 계승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승패를 막론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문명을 훼손하지 않았다. 중원 이외의 주변 지역에 사는 유목민족도 일단 중원으로 들어오면 빠르든 늦든 간에 어느 순간에 화하문명의 일원이 되고 말았다” (22쪽) (촌평: 유목민족이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한족이 신선한 피로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하는 范文瀾의 역사 인식과 맥이 닿아 있는 듯 합니다)



☞ “’화하(華夏)’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장태염은 화산(華山)과 하수(夏水)에서 따온 말이라고 하였지만, 어떤 학자는 ‘화(華)’는 하남 신정(新鄭)의 화양(華陽), ‘하(夏)’는 본래의 뜻인 ‘크다’라는 의미라면서 중원의 대족(大族), 또는 화양에서 시작된 중원의 대족이란 뜻이라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화(華)’가 후대로 넘어가면서 점차 화산이나 화양 등 구체적인 지명의 의미에서 벗어나 ‘번영’의 뜻을 지니게 되었으므로 ‘화하’는 ‘번영하는 중원의 대족’이란 뜻이라고 풀이하는 학자도 있다” (34쪽)



☞ “문명의 규칙은 한 번의 창건으로 지속적인 태평세월을 보장하지 않으며, 한 번 멸망으로 모든 것이 와해되는 것은 아니다. 천하는 또다시 누군가에 의해 보수되고 세상도 마찬가지로 새롭게 고쳐진다. 최고의 구세주는 바로 최고의 수리공이다” (46쪽)



☞ “문화는 물과 같고 영토는 그릇과 같다. 그릇이 깨지면 물을 어떻게 담을 수 있겠는가…중화문명은 지속되어야 할 일만 가지의 이유가 있었지만 19세기에 들어오자 종결되어야 할 일만 한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세기말’의 무게가 그만큼 무거웠던 것이다” (62~63쪽) (촌평: 위치우위의 글쓰기 냄새가 물씬 나는 듯 합니다)



☞ “중국에서 민족의 안위와 관련된 역대 전쟁을 살펴보면, 처음엔 적지 않은 무장들이 전투에 참가하지만 최후까지 저항하는 이들은 무관이 아닌 문관들이었다” (66쪽) (촌평: 싸움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 “물은 유순하고 조용하게 아래쪽으로 흘러 무언가를 윤택하게 하거나 적셔주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물은 스며들고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거나 아예 어딘가로 사라지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도리다” (95쪽)



☞ “유네스코는 수천 년 동안 세계에서 외국어로 번역되어 가장 광범위하게 전파된 저작 가운데 1위는 『성경』이고, 2위는 『노자』라고 발표한 바 있다. 뉴욕타임스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고금에 걸쳐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10대 저자 가운데 노자가 1위에 올랐다. 전세계적으로 철학적 소양이 뛰어나다고 평가 받고 있는 독일의 경우 『노자』가 거의 한 집에 한 권씩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97쪽) (촌평: 노자가 그토록 많은 독일인에 의해 읽히고 있다니 놀랍습니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외국기업 가운데 독일기업의 준비가 가장 잘 돼 있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네요)



☞ “노자의 ‘도’는 황진(여기서는 사막의 먼지를 말한다) 날리는 황량한 사막에 멈추고, 공자의 ‘도’는 홍진(紅塵, 번화한 세속의 먼지) 날리는 궁읍(宮邑)에서 멈췄다” (99쪽)



☞ “묵(墨)은 흑(黑)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묵자의 원래 성은 묵이(墨貽)인데, 생략해서 ‘묵’이 되었으며 묵적(墨翟)으로 불렸다. 제자백가 가운데 그를 제외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학파를 칭한 예는 없다…그가 검은색을 고수한 것은 자신이 사회의 밑바닥 노동계층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묵자가 대변한 계층은 이보다 훨씬 넓어 노동자들 이외에도 더욱 낮은 노예나 형도(刑徒)들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묵’이란 말이 고대의 형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전목(錢穆) 선생의 말에 따르면, 묵자는 ‘형도처럼 고통스러운’ 천민계층을 대변한다” (115~116쪽)



☞ ”묵자는 누구보다 유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는 그는 끝내 유가를 부정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차별이 없는 ‘겸애(兼愛)’로 등급을 중시하는 유가의 ‘인애(仁愛)’를 부정한 것이다…(유가는) 자신과의 원근 관계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된다…묵자는 이러한 이기적 사랑 대신 ‘겸애’를 주장했다.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124쪽)



☞ “유가의 ‘인애’가 전제이자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예(禮)’다. 그것은 주례(周禮)를 바탕으로 한 등급질서를 중건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가가 볼 때, 사회에 등급이 없어 세계가 모두 평등하다면 존엄이나 경외는 존재할 수 없고, 질서 또한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묵가의 입장은 다르다. 세상은 본래부터 평등한 것이다. 따라서 공평해야만 비로소 모든 이들의 존엄이 가능해진다. 세상은 평등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질서를 만들어 어떤 상부 계층을 존경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굳이 경외하고자 한다면 귀신을 경외하면 된다…맹자는 겸애란 모르는 사람을 마치 자신의 양친처럼 사랑하는 것이니, 이는 양친을 양친으로 여기지 않는 것으로서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빈정거렸다” (125쪽)



☞ “유가는 비교적 실제적이다. 그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를 확대함으로써 점차 더 많고 더 넓은 범위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실행 가능성이 높다. 이에 비해 묵가는 비교적 이상적이다…’겸애’는 결코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127쪽)



☞ 『시경』은 누가 창작했는가? 당연히 황하 유역에 흩어져 살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다…일종의 집체창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경』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개체 시인이 빠진 시가의 시대라는 점이다…『시경』이 우리에게 과연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처음 알려주었다면, 굴원은 시인에 대해 처음으로 알려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시경』의 시인들이 밥 짓는 연기 자욱한 뭇 삶의 현장에서 시를 썼다면 굴원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시를 썼다고 할 수 있다” (157~161쪽)



☞ “하이데거는…한 개인이 자기 생명의 형성과 처한 상황, 그리고 병들고 노쇠함에 대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을 때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마감하는 방법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165쪽)



☞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책략을 갖춘 군주들 가운데 자신의 의지대로 관리를 파면하거나 승진시키는 일종의 유희를 즐긴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아마도 이러한 유희 속에서 자신의 손에 쥐어진 권력의 즐거움을 만끽했을지도 모른다” (192쪽) (촌평: 그런 유희의 즐거움을 알기에 그런 위치에 오르려고 기를 쓰는 불쌍한 인간들이 세상에는 많지요)



☞ “문화는 특히 난세에 특별한 매력을 낳는다. 그것은 결코 순수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오히려 어둠을 배경으로 삼고 사악을 이웃하며, 불안을 표정으로 삼는다. 대부분 공정과 사악이 상생하고 흑과 백이 갈마든다. 그것은 마치 보들레르가 말한 ‘악의 꽃’과 같다” (206쪽)



☞ “청대 학자 조익(趙翼’)은 『이십이사찰기(二十二史札記)』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삼국이 대치할 당시 조조는 주변 사람들과 주로 권술로 투합하였고, 유비는 성정으로, 그리고 손권은 의기로 투합하였다” (208쪽)



☞ “조조는 후장(厚葬)을 경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자신의 분묘가 도굴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강력하게 박장(薄葬)을 주장했다. 그는 임종하기 직전 ‘시복(時服) 그대로 거두고, 금은보화는 부장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여기서 ‘시복’이란 평상시에 입던 의복을 말하니, 주검을 평복 그대로 관에 넣으라는 뜻이다…조조가 도굴을 막기 위해 장하(?河) 일대에 72군데 분묘를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한 곳만 진짜 분묘라는 이야기는 송대부터 시작된 것 같다…장(葬)은 곧 장(藏)이다. 평소 입던 옷 그대로 산림과 하나가 되어 비석도 없고 기물도 없으며 묘도(墓道)도 없어 아무도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됐다. 없는 데 어떻게 찾는다는 말인가? (222~226쪽)



☞ “운강석굴을 처음 시공하기 시작한 이는 승려인 담요(曇曜)다…그는 원래 양주(凉州, 지금의 감숙성 무위 일대)의 고승이었다…양주의 석굴 양식은 크게 신강 귀자(龜玆, 지금의 쿠처 일대)와 우전(于?, 지금의 화전 일대) 일대의 양식으로 구분된다. 귀자와 우전은 진정한 의미의 서역으로, 특히 인도 문화와 남아시아 문화, 중앙아시아 문화로 연결되는 교차점에 위치한다…운강석굴을 방문한 수많은 방문객들은 그곳에서 그리스 조각(그리스 신전기둥을 포함)의 풍격을 느끼며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는 물론 간다라 예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간다라 예술은 그리스 문화와 인도 문화의 융합체이다…당나라가 대당이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순수하지 않음 때문이다” (300~302쪽) (촌평: 한족 우월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작가의 숨결이 느껴진다)



☞ “넓은 천지의 대다수 민중은 자신을 위로해줄 신앙이 필요하다” (318쪽)



☞ “유학은 어떻게 하면 치국평천하 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빠져버리고, 도교는 어떻게 하면 신선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몰입한다. 또한 법가는 권모술수의 문제에 치중하고, 시인이나 문사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문장을 짓느라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오직 불교만이 절대로 다른 문제에 한눈 팔지 않고 인간의 생로병사에 관심을 표명하고, 삶의 고해를 벗어날 방법을 탐구한다” (320~321쪽)



☞”불교는 본래 중생을 인도하여 탐욕을 버리고 초월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는데, 오히려 이와 반대로 탐욕 때문에 예불하는 현상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얼핏 향불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욕망의 불길이나 다름 없었다” (330쪽)



☞ “궁중 이야기로 인해 시정(市井)의 모습이나 전국 각지에 사는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 묻혀버리는 상황은 중국의 ‘관본위(官本位)’ 관념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339쪽)



☞ “당대 말기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에 급제한 신라 선비가 50여 명이었다. 과거제도는 문관 선발제도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시험에 급제하면 외국 국적을 가졌더라도 중국에서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342쪽)



☞ “우리가 이백(李白)에게 느끼는 경이, 놀라움이 사실 그의 경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일종의 경이의 전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평생 산수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인성과 자신에게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를 천진난만하게 만들었다…이백과 두보가 서로 만난 것은 744년의 일이다. 그 해 이백은 마흔셋이었고, 두보는 서른둘이었으니 열한 살의 차이가 난다…두 사람은 안사의 난으로 확연하게 달라지는 당대 전후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이백의 작품은 주로 안사의 난 이전에 쓰였고, 두보의 작품은 주로 안사의 난 이후에 창작된 것이다” (362~367쪽)



☞ “시끌벅적한 중화 대가족은 오랜 세월 지내오면서 영욕과 성패가 어지러이 교차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좀 더 높이 올라 바라보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승패와 영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가을바람이 불면 모든 잎이 떨어지기 마련이니, 굳이 마지막 떨어지는 단풍잎을 본보기로 삼겠는가? 흰 눈이 녹기 시작하였는데, 어찌 처음 내리는 봄비를 탓하겠는가?” (404~405쪽) (촌평: 후반부 문장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 “죽은 것은 조정이지 문명이 아니다. 조정의 존재방식은 정권 교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산다. 그러나 문명의 존재방식은 교체가 아니라 누적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 (405쪽)



☞ “처량함은 고귀한 인생을 산 사람들에 대한 하늘의 자연스러운 마감으로, 가치 판단과 거리가 멀다” (412쪽)



☞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달리 주원장의 문화 전제주의는 체계적으로 기획되고 엄격한 통제 속에 이루어졌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장시간 지속되었다…(주원장은) 오랜 고민과 계획 하에 과거시험을 위한 엄격한 제도를 제정했다…문관은 반드시 과거를 통해야 한다. 과거 응시생은 반드시 학교를 나와야 한다. 시험 문제는 반드시 『사서』와 『오경』에서 출제되어야 한다. 논술은 반드시 자신의 의견을 배제해야 한다. 문체는 반드시 팔고(八股)를 따라야 한다. 전시(殿試)는 반드시 황제가 주재해야 한다. 이리하여 황제와 조정은 정치권력의 끝이자 과거의 끝이고, 전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문화와 교육사업의 끝이 되었다…이런 제도로 인해 중국문화는 전반적으로 완전히 조정의 도구이자 황가의 노복신세가 되고 말았다” (460~461쪽)



☞ “후대 개혁가들은 명·청 시기 전제주의에 대한 분노로 인해 자연스럽게 유학, 더 나아가 공자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그리하여 ‘예교흘인(禮敎吃人, 예교가 사람을 잡아먹는다)’이라는 명목으로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 공자를 타도하자)’을 제창하였다. 5·4 운동 시기에 연출된 상황이다” (466쪽)



☞ ”청나라 초기 필봉이 예리했던 학자 부산(傅山)은 더욱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고담준론을 펼치지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들은 오랜 세월 길러진 노예근성의 산물이니 그저 ‘노유(奴儒)’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고 했다…’노유’들은 작은 도량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옛사람들의 몇 마디 주석에 의지하고도 자칭 ‘근본이 있는 학문을 한다’고 떠들어댄다. 세간의 사물을 보아도 아무런 감각이 없고, 그저 공허한 말만 지껄일 뿐이다. 누군가 성과를 얻으면 각종 누명의 씌어 그를 모함에 빠뜨리고 만다…그에 비해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당견과 같은 문화사상가들은 더욱 깊이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중국문화의 여러 가지 화근의 원초적 뿌리는 바로 전제 군주, 즉 ‘독부(獨夫)’들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문화인이라면 모든 이에게 책임이 있는 ‘천하’와 일가로 이루어진 왕조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가의 흥망은 사적인 일이지만 천하 민중의 생사는 공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470쪽)



☞ “이미 작고한 왕소파(王小波)는 중국 문화계에는 단지 두 종류의 사람, 즉 일을 하는 사람과 타인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후자의 힘이 오히려 막강하다. 중국 문화의 최대의 함정을 파는 실체는 바로 이것이다…중국문화는 서구문화에 비해 법제 의식 역시 부족한 편이다. 인신권(人身權)이나 명예에 대한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비방이나 모함을 죄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502쪽)



☞ “나는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마을에 문맹인 농부가 살았는데, 어는 날 우연히 길가에서 글자가 적힌 종이를 발견하였다. 오래된 신문지인 것 같은데 그는 그냥 밟고 갈 수 없었다. 그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종이를 접어 들고 조심스럽게 사당 문 옆에 놓인 향로로 가서 불태웠다. 향로에는 이런 글자가 적혀 있었다. ‘경석자지(敬惜字紙, 고대 중국인들은 글자를 영험한 것으로 생각했다. 창힐이 글자를 만들었을 때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내리고 밤에 귀신이 울었다’고 한 것은 이런 예라고 할 수 있다. 경석자지, 즉 글자가 적힌 종이라면 설사 폐지라도 아낀다는 관념은 이를 통해 생겨난 것이다. 심지어 글자가 적힌 폐지를 물로 닦고 잘 말린 후 향로에 넣고 불에 태웠다)’ 옆 마을에 사는 어부들은 특히 바람이 많이 부는 계절이 되면 물고기를 잡으러 갈 때마다 제법 먼 길을 걸어 서생이 사는 집에 들러 글자가 적힌 종이를 잔뜩 얻어다가 뱃바닥에 쌓아놓곤 했다. 그들은 세상에 글씨보다 무거운 것이 없으니 글씨가 적힌 종이를 뱃바닥에 눌러두면 풍랑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그들은 글자가 소중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506~507) (촌평: 촌로들의 순박한 마음이 어째 짠~하게 다가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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