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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웅의 오! 마이 미디어] '응답하라 1994' 제작자가 억울한 이유

중앙일보 2014.04.03 00:40 종합 6면 지면보기
방송인을 울리고 웃기는 숫자가 있다. 매일 아침 책상에서 출근하는 방송인을 기다리는 숫자다. 사람이 숫자를 읽는 게 아니라 숫자가 사람을 노려보는 느낌이라고 한다. 시청률이다.



 시청률에 울고 웃는 방송인을 보면 애잔해진다. 관객의 호응에 신들린 듯 반응하는 무대 예술인이 정상으로 보일 지경이다. 관객은 직접 볼 수나 있지 않은가. 숫자로만 존재하는 시청률에 방송인은 반응한다. 예컨대 일일시청률로 1~2% 내의 시청률 변화는 ‘측정 오차’의 범위에 들어간다. 이를 알면서도 올랐다고 좋아하고 떨어졌다고 좌절한다.



 현행 시청률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도 그렇다. 이른바 ‘본방 사수’가 줄고 있다. 대신 인터넷을 경유해 디지털 플랫폼으로 다시보기·몰아보기·넘겨보기를 한다. 젊은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로 이동기기에서 잠깐씩 방송을 본다. 현행 시청률은 이런 행위를 측정할 수 없다. 미디어 제도가 미디어 이용자의 행위를 좇지 못하는 경우라 하겠다.



 얼마 전 tvN의 ‘응답하라 1994’ 제작자는 억울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본방 사수하지 않았더라도 인터넷을 통해 사후적으로 본 시청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바쁘지만 구매력이 높은 486 시청자들이 본방 사수 이외의 방식으로 많이 봤을 텐데, 그들이 시청률에 반영되지 않아 속상했을 것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JTBC 드라마 ‘밀회’도 마찬가지다. 장담하건대 방송시간을 기다려 직접 TV로 시청한 사람만큼이나 다운로드 방식이나 인터넷TV의 다시보기로 시청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시청은 현행 시청률에 반영되지 않는다.



 한때 방송이 시청률에 연연해 문제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미 오래전에 폐기됐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공영방송인 BBC조차 ‘공적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시청률과 점유율을 중시한다. 수신료와 같은 공적 부담금을 들여 제작한 방송이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받는다면 결국 공영방송의 임무를 실현하지 못한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상업방송은 말할 것도 없다. 불신과 질투가 가득한 미디어 분야에서 시청률은 그나마 ‘신뢰할 수 있는’ 공통 지표가 된다.



 시청률을 비롯한 미디어 지표는 이용자 규모 이상의 것을 보여 준다. 그것은 변덕스러운 개인의 취향이 어떻게 집합적 경험으로 결합되는지 보여 준다. 평등하고 다원적인 취향의 민주주의 덕분에 우리의 문화적 경험은 점차로 파편화하고 있다. 시청률·열독률·관객수·클릭수 등 미디어 지표들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 공동의 관심이 형성되는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시간이 걸리겠지만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일단 시청률 측정의 표본을 설정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TV 시청 가구가 아닌 미디어 이용자 개인을 모집단으로 설정해야 한다. 또한 지상파와 케이블채널의 본방 시청만 측정해서는 곤란하다. 스마트 미디어를 이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방송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행위를 측정해야 한다.



 현실에 대한 타당한 지표가 없는 사회에서 정확한 현실인식을 가질 수 없다. 정확한 현실인식이 없는데 제대로 된 미디어 기획과 정책을 기대할 수 없다. 미디어 제도가 이용자 현실을 뒤쫓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그럴듯하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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