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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택 기자의 '불효일기' <2화> 암환자 가족에게 가장 어려웠던 그것, 바로 대화

온라인 중앙일보 2014.04.02 17:21
휴일을 맞아 아버지와 산책을 나섰다. 서울 양천구 용왕산 인근 토스트집에서 같이 한 컷. [이현택 기자]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거나 너무 오래 끌면 그 일에 대한 성의가 없어서 소홀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데, 암병동에서는 은근히 회자가 많이 된다.



본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다수가 옛날 기준으로 치면 불효자일텐데, 무슨 효자 운운하고 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말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아픈 부모에게 작은 것이라도 해드릴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암 환자는 외롭다. 내 아버지도 3년간 치료를 받아왔지만, 심심하다는 말을 많이 해왔다. 결혼한 아들은 일하느라 바쁘고, 어머니도 일을 나간다. 일몰 후에야 재밌는 TV프로그램이 많이 하니, 해가 떠 있는 시간은 지루함과의 싸움일 수도 있다. 살 시간이 줄어들까봐 걱정하는 그 시간이 너무 따분한 역설적인 상황이다.



하루 쉬는 날이 주어지면, 나는 주로 아버지와 잡담을 하려고 한다. 요 며칠 전에도 하루가 비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만났다.



사람은 지나간 과거를 회고하기를 좋아한다. 몸이 아픈 암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픈 요즘 일상보다는 지나간 이야기를 하기를 즐긴다. 이날 역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업의 부침(븖뮶) 같은 것은 물론이고, 그 옛날 ‘잘 나갔던’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다. 1시간은 금세 지나간다.



하지만 레퍼토리가 항상 있지는 않다. 처음에는 나 역시 갑자기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럴 때면 아버지 역시 내게 이야기를 묻기도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회사 이야기 등을 묻는다. 어떤 선배가 최악이냐는 뻔한 질문도 있었다.



딱히 할 말이 떨어졌을 때, 가장 쉬운 이야깃거리는 지난 암 치료에 대한 이야기다. 이날의 대화는 2013년 8월 16일로 흘러간다.



2013년 8월 16일 오전 10시 30분. 의사의 호출에 온 가족이 대학병원에 갔었다. 수 차례의 항암치료를 했던 아버지에게는 더 이상 쓸 약이 없다(식도암 치료제는 3종류 정도 인데, 다 써봤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임상시험을 하는 것 외에는 약은 없고, 그 약도 한 자리가 남았다고 했다. ‘전이성 또는 재발성 식도 편평세포암 환자에 대한 OOO약품의 제2 임상시험’이었다.



아, 어떡하지. 당사자인 아버지는 더 걱정이겠지만, 나 역시 할 말을 잃었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아버지가 임상시험을 받는다는데 할 말이 있는 아들이 더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다 큰 아들은 엉엉 울었다. 그러고 웃으면서 해보자고 했다.



때로는 악재가 호재가 될 수 있다. CT촬영을 했는데 식도암이 폐에만 전이가 된 것이 아니라, 위에서도 발병을 했다는 진단이 나왔다. 위암약은 다양하게 쓸 수 있고, 작지만 위암도 발병해 있으니 보험가로 투약할 수 있다고 했다. “효과가 있는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시도해 봅시다.”



‘시도’라는 말 자체가 고마웠다. 한 회에 수백만원 한다는 좋은 약들이 있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댈 수 없는 뻔한 월급쟁이은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 새로운 약을 쓸 수 있다는 의사의 통보는 정말 반가운 소리였다. ‘위도 아프냐’는 걱정보다 쓸 수 있는 약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지금도 아버지는 그 때 이후 진행된 항암치료를 진행하고 있다. 2014년 4월 2일. 오늘도 아버지는 입원했다. 하지만 담담하다. 암을 무서워하기 보다는, 남은 삶을 건강하고 즐겁게 살자고 함께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물론 암환자는 무섭다. 아버지만 해도 처음 암 선고를 받고서는 많이 울었다. 같이 대학병원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것만 수 차례였다. 그럴 땐 같이 엉엉 운다. 하지만 이내 또 즐겁게 밥을 먹는다. 회진 나온 의사가 “산전수전 다 겪으셨네요”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치료를 했고, 또 이겨냈지 않나.



첫 발병은 2011년이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메모를 해놨다.



2007. 6. 26. 지역병원 목부위 혹 발견(건강검진)

2007. 7. 31.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후두부분 상피내암 수술(1차)

2007. 8. 31.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후두부분 상피내암 수술(2차)

2011. 1. 12. 대학병원 소화기외과. PET CT 촬영

2011. 1. 21. 대학병원 소화기외과. 식도암 판정. 수술 결정

2011. 2. 13. 대학병원 소화기외과. 식도암 수술.

2011. 2. 28. 퇴원

2011. 3~5월. 3차례 항암치료.



여기까지가 1차 기록이다. 물론 치료를 마친 뒤, 하루 하루 아버지가 메모해 놓은 기록이다. 치료를 했는데 어떤 진료를 받았는지 알아야겠느냐면서 말이다. 식도암과 상관 없었다는(의사 소견) 후두 상피내암을 제외하고, 2011년 식도암판정은 가족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후두 상피내암 때만 해도 별 걱정 안했다. “아프긴 했지만 보험금이 약간 나왔으니 고기 먹으러 가자”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첫 암 수술 때만 해도 “잘라내면 곧 건강해 진다”면서 희망을 가졌다.



2012년 3월 암이 재발한 후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1차 재발은 잘라낸 식도 인근 림프절에 전이되면서다. 방사선 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했다. 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2012. 3. 22. 오후 1시 10분 방사선 설계용 CT 촬영.

2012. 3. 27. 오후 2시 50분 방사선 조준



이후 3월 28일부터 5월 15일까지. 매일 오후에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매일 왕복 2시간씩 버스를 타고 통원했다. 3주마다 3일씩 입원해 항암 약물치료를 하는 것은 병행하면서다. 방사선이 끝난 뒤로도 2012년 6.28, 7.18, 8.8, 8.29, 9.20일에 항암치료를 받았다. 담당 의사는 암세포가 없어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고, 주당(?)인 어머니와 함께 그날은 코가 비뚤어지다못해 없어질 만큼 술을 마신 것 같다.



새옹지마. 기쁨은 3개월이고, 다시 일상(?)이 돌아왔다.



2013년 4월 24일 오전 11시. 이번에는 암이 폐로 전이가 된 것 같다고 한다. 당장 입원과 함께 폐를 절개했다. 오른쪽 폐는 복강경 수술로 암 세포를 긁어냈다. 그간 많은 치료를 해서인지 “이 정도면 할만하다”고 했다. 하지만 왼쪽 폐는 갈비뼈 옆을 절개해 암 덩어리를 잘라냈다. 정말 엄청 앓았다. 회사를 하루 쉬고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더 힘들 정도였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진행한 3차례의 항암치료. 2013년 6.4, 6.26, 7.17일 등에 진행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신약 임상시험 외엔 답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가, 위암약을 써보자는 말에 새로운 약을 투여하고 있다.



어찌보면 절망적인 치료기다. 하지만 암 선고를 받고 1년을 운운하던 상황에 비하면 벌써 3배가 넘는 기간이 지났다. “이렇게 1년씩 주님과 재계약하면 되지 않느냐”며 농을 칠 정도다. 치료의 기억들은 지금도 주마간산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그 당시에는 꽤 힘들었던 기억인데, 요즘에는 식사하면서 안주 거리로 말하고는 한다. “3년이 넘는 암치료도 버텼는데 뭐가 무섭냐”면서 말이다.



주말에 하루 잡아 아버지와 산책을 겸한 하루 데이트는 치료 이야기로 금방 끝나버렸다. 건강할 때에는 ‘뛰어서 올라갔을’ 작은 산인 용왕산을 살살 걸었을 뿐인데, 피로가 몰려온다고 하신다. 그렇게 아버지는 댁으로 돌아가시고, 나 역시 금세 잠들었다. 불효자의 하루 휴일도 이렇게 간다.



*ps. 주말에 입원한 아버지 병실에서 죽치고(?) 있어 보면, 가끔은 부모를 병문안 온 자녀들을 보게 된다. ‘아버지 힘 내세요’ ‘몸 건강하세요’ 등의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부모가 원하는 것은 1시간 잡담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들, 딸이 왔는데 할 말이 좀 많았고, 참느라 좀 힘들었을까.



이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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