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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회장님이 억울하면 보통 사람은 좌절한다

중앙일보 2014.04.02 00:01 종합 31면 지면보기
일당 5억원 노역사건은 지켜보고 있기가 힘들다. 화가 나서 욕이 치민다. 지난 주말 TV뉴스에서 그 회장님이 “죄송합니다”며 고개를 숙이는 장면에서는, 옆에 아이들이 있는데도 욕이 나올 뻔했다.



 내가 화가 나는 건, 회장님 때문이 아니다. 누구라도 회장님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소나기는 피하려 했을 것이다. 누구든 줄 닿는 사람을 찾아내 하소연했을 것이다. 그게 사람이다. 세상에 누가 벌금 254억원을 선선히 갖다 바치나. 회장님은 애먼 사주(四柱) 탓만 하고 있을지 모른다. 뉴질랜드에서 카지노만 안 갔으면(그놈의 카지노가 그렇게 보안이 허술했다니!), 아니 사진만 안 찍혔어도 하며 씩씩대고 있을지 모른다. 회장님은 시방 운이 다한 팔자가 야속할 것이다.



 이번 사건은 회장님이 돈을 숨기고 몸으로 벌금을 때운 사건이 아니다. 법이 회장님 사정만 봐준 게, 그러니까 국가가 국민에 따라 처신을 달리한 게 이 사건의 전모다. 회장님의 일당 5억원 노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법에 따라 진행됐다. 회장님은 국가가 시키는 대로 유치장에 들어갔고 국가가 시키는 노역을 했다. 내가 화를 참을 수 없는 건, TV에서 사과한 사람이 회장님 한 명뿐이어서다.



 나라님이 법을 고치고 회장님 재산을 추적한다고 수선을 떠는 대목에선 차라리 한숨이 나온다. 정말 검찰은 회장님의 출국을 깜빡 놓쳤을까. 판사는 진정 잘못을 뉘우쳐 사표를 냈을까. 몇몇 개인의 잘못이었으면 지금 와서 법은 왜 뜯어고칠까.



 한편으론 나라님이 고맙다. 이참에 많은 사람이 유식해졌다. 검찰의 선고유예 청구가 뭔지 이번에 알았다. 나쁜 놈 잡아넣는 검찰이 회장님은 전과기록에도 안 남는 실질적인 무죄를 법원에 요청한 게 선고유예 청구였다. 벌금은 안 내고 버티다 보면 대충 몸으로 때울 수 있다는 것도 이번에 배웠다. 나라님은 아시는가. 아등바등 하루를 사는 사람은 이 사건 앞에서 좌절한다. 힘없고 기댈 데 없는 제 신세를 무기력하게 돌아본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 ‘강철중:공공의 적 1’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조폭 두목의 가족 앞에서 범죄를 추궁하는 형사 강철중에게 두목의 아내가 쏴붙이는 대사다. “너희가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가 더 잘 먹고 잘 살아!” 그때의 그 기고만장했던 얼굴을, 어디 감히 너희 같은 것들이 내 집에서 행패냐는, 그 경멸 어린 눈빛을 잊지 못한다.



 곤히 잠든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에게 내가 어떤 아빠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내 앞에 놓인 삶이 문득 버겁다.



손민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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