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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무대란 나를 나답게 하는 자기 확인의 장소

중앙선데이 2014.03.29 03:20 368호 14면 지면보기
열다섯 살 동양 소년이 연극의 본고장 런던에서 생애 첫 무대로 현지의 극찬을 받았다면, 분명 예삿일은 아니다. 후지와라 다쓰야(藤原竜也32). 1997년 55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세계적 거장 니나가와 유키오에게 발탁된 평범한 중학생은 런던에서 양어머니와의 금지된 사랑을 강렬히 연기해 단숨에 ‘연기 천재’ 반열에 올랐다. 2003년 일본 연극사상 최연소 ‘햄릿’으로 각종 상을 휩쓸며 ‘니나가와의 페르소나’가 됐다. 이후 영화·드라마를 넘나들며 전방위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동세대 배우들과는 입지가 다르다. 평범한 로맨스물에선 그를 볼 수 없다. ‘배틀로얄’ ‘데스노트’ 등 고도의 연기력을 요하는 장르영화의 광기어린 배역이 그의 차지다.

내한 공연 마친 ‘무사시’ 주연 후지와라 다쓰야

2011년 첫 내한공연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니나가와가 후지와라를 대동하고 다시 한국을 찾았다. 2009년 초연 이후 런던, 뉴욕, 싱가포르에서 극찬받은 ‘무사시’(LG아트센터·3월 21~23일)에서 후지와라는 5년째 일본의 국민 영웅 미야모토 무사시로 살고 있다. 올해만 해도 한국 영화 ‘초능력자’를 리메이크한 ‘몬스터즈’ 등 5개의 주연 영화가 줄줄이 개봉을 대기 중인 가장 ‘핫한’ 배우인 그를 리허설 직전 만났다.

연출가 니나가와 유키오
-영화와 드라마에서 바쁘게 활동 중인데 굳이 연극을 병행하는 이유는.
“무대는 자기 확인의 장소랄까 내가 나답게 있을 수 있는 장소다. 연극이 갖는 절대적인 파워를 믿고 있다. 영화는 우리 몸이 없더라도 간단히 국경을 넘어 영화제 등을 갈 수 있지만, 연극은 이렇게 직접 와서 몸을 사용해서 표현해야 하지 않나. 그 성취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어린 나이에 세계적 거장에게 발탁됐다. 니나가와는 배우에게 재떨이를 던질 정도로 엄하다던데.
“아무것도 몰라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 무대에 설 수 있는 32세의 나 자신이 있는 것은 15세 때부터 그와 함께 싸워 온 덕분이다.”

-연극의 깊고 넓은 세계관을 너무 어려서 만난 것 아닌가.
“데라야마 슈지, 가라 주로 등 천재들의 희곡을 연기해야 했기에 지금의 나는 매우 너덜너덜해져 버렸다(웃음). 니나가와의 작품은 전부 힘들다. 작품을 해외에 가져간다는 사실부터가 어려운 일이고, 항상 싸우고 있는 느낌이다.”

‘무사시’는 에도 시대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가 라이벌 사사키 고지로와 벌인 진검승부를 일본의 국민작가 고(故) 이노우에 히사시가 유머와 감동으로 풀어낸 작품. 문화개방 이후 전례 없이 한·일 관계가 냉각된 지금, 셰익스피어의 거장 니나가와는 왜 굳이 일본적인 작품을 가져온 걸까. ‘76대1’의 전설 등 60여 차례 결투 중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강한 일본인’의 상징 미야모토 무사시가 위화감을 주지 않을까. 탄생 450주년을 맞은 셰익스피어로 오는 것이 정답 아닌가-.

어리석은 의문이었다. 이노우에는 천황제와 전쟁책임의 문제를 다뤘던 반전활동가로, 평화헌법 수호를 위한 시민단체를 만들기도 한 민중작가다. 세계의 대립과 반목을 ‘생명존중’으로 풀자는 화해의 메시지를 대립의 전형이자 일본의 역사적인 진검승부를 뒤집어 표현한 자기비판적인 극이 바로 ‘무사시’였다. 결투를 위한 무술훈련이 서서히 탱고춤으로 전환되는 등 전통예능 노(能)의 내용과 형식을 패러디한 지극히 일본적 아름다움 속에서 자기비판을 표현한 고도의 아이러니에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연극 ‘무사시’중에서
-매우 일본적인 이야기인데 해외공연에서도 극찬받고 있다.
“이노우에 선생은 일본 문학을 독특한 수법으로 만국에 통용할 수 있게 완성했다. 일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대립하는 주체들에게 서로 미워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지 않느냐는 제안을 했다. 지금의 일본이나 세계정세에도 통하는 부분이 있고, 그런 점이 크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니나가와 역시 차원이 다른 생각을 하는 분이다. 그의 무대를 보면 그 세계관에 압도되어 마음이 떨리고, 내가 작은 존재로 생각될 정도다.”

-‘연기천재’ 이미지라 주로 강렬한 배역만 맡는데, 후유증은 없나.
“그래서 내가 사생활에서 바보인가 보다.(웃음) 하지만 평범한 역할은 하고 싶지 않다. 5월 한국 영화 ‘초능력자’를 리메이크한 ‘몬스터즈’를 개봉하는데, 역시 좀 이상한 역할이지만 정말 즐거웠다.”

일본에서 한국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은 ‘말아톤’ 이후 6년 만이다. ‘링’으로 유명한 호러영화의 거장 나카다 히데오와 드라마 ‘백야행’의 야마다 다카유키가 뭉쳤다. 그는 ‘초능력자’에서 강동원이 분했던 초인을 연기했다. “한국판이 굉장히 흥미로웠고, 나카다 감독이 강력히 권해서 하게 됐다. 한국판과는 결말이 달라서 둘 다 봐도 재미있을 거다.”

한국에도 팬이 많은 상대역 야마다에 대해 “텐션이 대단하다”고 치켜세웠지만, “후지와라의 연기는 시적이다. 영혼의 응어리가 동세대 배우들과 다르다”는 니나가와의 말처럼 그의 연기엔 대체 불가능한 면이 있다. 예컨대 겉은 20대, 속은 70대인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드라마 ‘할아버지는 25살’) 자연스러운 노인의 포스를 뿜어낸다. 본인도 또래 배우들이 아닌 연극판의 선배들을 연기 라이벌로 꼽을 정도다.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강하고 멋있다. 다른 배우에게 지지 않는 자기만의 매력을 갖고 있다. 그들의 그런 점을 존경하고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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