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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돌 맞은 TED, 변신은 무죄

중앙일보 2014.03.29 01:02 종합 17면 지면보기
TED 2014에서 화상 채팅용 로봇과 함께 등장한 에드워드 스노든(위), 둘째 날 연사로 나선 빌 게이츠 부부(가운데), 콘퍼런스 마지막 날인 21일에 출연한 개브리엘 기퍼즈 전 미국 연방 하원의원(아래). [사진 TED]
TED가 변했다. 1984년 창설 이후 30년째 이어져 온 TED의 덕목은 ‘비정치적(non-political)’ 그리고 ‘초당적(non-partisan)’이었다. 정파적이거나 이념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선 최대한 언급을 피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런 TED가 정치적 이슈에 목소리를 높이고 나섰다. 기술(Technology)을 뜻하는 T,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의 E, 디자인(Design)의 D에 정치(Politics)를 뜻하는 알파벳 머리글자 P를 추가해야 할 판이다. 지난 17~21일(이하 현지시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TED 2014’에선 e러닝·인공지능 등 기술 이슈뿐만 아니라 반(反)부패·반테러리즘 등 사회적 이슈, 국가 안보 대 개인 인권 같은 이슈에 이르기까지 과감한 정치 메시지가 나왔다.


TED+P … 혁신기술 경연장서 '정치 콘서트'

 특히 올해는 디지털 시대와 인터넷 세상을 예측했던 TED가 ‘디지털 혁명의 부작용’이라는 화두를 논의의 중심에 올려놓은 해다. 현재 미국 정치의 최대 화두인 ‘빅 브러더(정보 독점을 통한 사회 통제)’ 문제다. 콘퍼런스 내내 가장 주목을 받은 인물도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30)이었다. 그는 지난해 미국 국가안보국(NSA)과 CIA의 불법적인 개인정보 수집 사실이 담긴 문건을 폭로해 현재 미국 정부로부터 수배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스노든의 TED 출연 방식은 전에 없이 획기적이었다. 18일 TED 기획자인 크리스 앤더슨이 예고도 없이 스노든을 연사로 소개했다. 그리고 무대에는 사람 대신 스크린과 바퀴가 달린 로봇이 유유히 커튼을 젖히고 들어왔다. 스크린 속 인물이 바로 스노든이었다. 화면 속 스노든이 “여러분이 다 보이니 아주 신기하다”고 말하자 청중 대다수는 탄성을 연발했다.



 화면 속 스노든은 “나는 영웅도 아니고, 애국자나 배신자도 아니며, 단 한 사람의 미국 시민일 뿐”이라며 “국가 안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미국 정보당국이 개인정보 수백만 건에 아무렇지도 않게 침입하는 것을 보고 도·감청 실태를 폭로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국가 안보에 맞서 ‘인터넷 자유 수호’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스노든이 TED 콘퍼런스를 공론화의 장으로 활용한 셈이다.



 다음 날인 19일, 이번엔 래리 페이지(41) 구글 최고경영자(CEO)가 스노든에게서 공을 넘겨받았다. 페이지 CEO는 “인터넷 세상에서 사생활 보호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국민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다”며 오바마 행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페이지는 “어느 정보를 왜 수집하는지 경계선을 명확히 세워야 한다”며 “어떤 정보를 수집해도 되는지 국민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토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의 수장이자 미국 경제를 대표하는 인물이 미국 정부의 인터넷 정책에 대해 정면 비판을 한 것이다.



 이틀 뒤인 21일, 결국 NSA가 한발 물러섰다. TED에 화상 출연한 리처드 레짓 NSA 부국장이 미국 정보당국의 투명성 부족을 인정했다. 그는 “미 정보당국과 당국의 개인정보 수집 방법이 지금보다 더 투명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시인했다. TED가 단 나흘 사이 미국 정부의 전향적인 태도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TED의 정치 참여는 스노든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부인이자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 의장 멀린다는 TED 강연장에서 “나는 가톨릭 신자지만, 여성이 피임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산아제한 정책을 적극 지지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날인 21일에는 2011년 미국 애리조나 총격 사건 당시, 머리에 총상을 입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개브리엘 기퍼즈(43) 전 미국 연방 하원의원 부부가 연사로 등장했다. 이 자리에서 기퍼즈 부부는 “(총기 소유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2조를 지지하지만, 더 이상 소중한 생명이 희생되지 않도록 기존 총기법을 개정해야 한다”며 “미 연방의회 의원들도 더 이상 총기 규제 문제에 대해 이익집단의 눈치를 봐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 사회 내 보수주의자들에 맞서 총기 규제의 당위성을 알리려는 시도인 셈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슬람권이 주도하는 테러리즘에 대해선 반대 입장을 명확히 드러냈다. 콘퍼런스 첫날인 18일에는 딸이 탈레반에게 총상을 입은 파키스탄인 지아우딘 유사프자이, 그 다음 날에는 아버지가 테러리스트였던 아랍계 미국인 자크 에브라힘이 연사로 등장해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처럼 TED는 단순히 기술진보뿐만 아니라 전(全) 세계적인 어젠다를 제시하는 데 훨씬 신경 쓰고 있다. TED 기획자 크리스 앤더슨조차도 “TED 초기와 비교해 보면 현재의 TED는 이전보다 저널리즘적 성격이 강화됐다”고 밝힐 정도다.



밴쿠버= 김영민 기자




의족 댄서의 룸바춤



TED는 해마다 역경을 극복한 다양한 사람의 감동 스토리를 선보인다. 올해엔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잃은 주인공들의 인생 도전이 관중들을 울렸다.



 19일(현지시간) TED 강연이 진행 중이던 캐나다 밴쿠버 컨벤션센터. 흰 드레스를 입고 왼쪽 다리에는 의족을 한 여성 댄서(왼쪽)가 검은 옷차림의 남성 댄서와 함께 룸바춤을 선보였다. 지난해 4월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로 왼쪽 다리를 잃었던 프로 댄서 에이드리언 헤슬릿 데이비스(33·사진)가 힘겨운 재활을 끝내고 복귀하는 ‘컴백 무대’였다. 반짝이는 장식이 달린 하얀 미니 드레스를 입은 데이비스는 남성 댄서와 함께 라틴팝 가수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의 곡 ‘링 마이 벨’에 맞춰 화려한 율동을 선보였다. 첨단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인공 다리를 착용하고도 20가지가 넘는 다양한 동작을 정확히 구사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데이비스에게 의족을 만들어 준 휴 허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 생체공학연구소장 역시 1982년 암벽 등반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장애인이다. 그는 지난해 테러 사고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무대에 서기 위해 노력하는 데이비스의 사연을 듣고 “춤출 수 있는 인공 다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허 소장 연구팀은 200일간 댄스스포츠의 다양한 동작을 연구한 뒤 인공 다리의 구조에 적용하는 데 성공했다.



 데이비스의 공연에 앞서 강연자로 무대에 올랐던 허 소장은 “범죄자들이 3.5초 만에 데이비스를 무대에서 끌어내렸지만 우리는 200일 만에 그녀를 다시 무대에 돌려놓았다”고 말했다. 데이비스도 “나는 테러 ‘피해자(victim)’가 아니라 ‘생존자(survivor)’”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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