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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명문장 <11> 권재진 전 법무부 장관

중앙일보 2014.03.29 00:55 종합 18면 지면보기
우리 각자가 설 올바른 자리는 어디일까. 권재진 전 법무부 장관은 동양고전 『주역』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귀천은 지위에 있고, 대소는 괘에 있으며 길흉은 사(辭)에 있고, 회린(悔吝)은 기개에 있으며, 결함이 없는 것은 뉘우침에 있다. 괘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고, 사에는 위험한 것과 평이한 것이 있다. 사란 각자가 이른 경지를 가리킨다 (是故列貴賤者存乎位, 齋大小者存乎卦, 辨吉凶者存乎辭, 憂悔吝者存乎介, 震无咎者存乎悔, 是故卦有大小, 辭有險易, 辭也者, 各指其所之).


자리가 바르지 못하면, 귀한 것도 천하게 여긴다

- 공자의 『주역계사전』에서



『주역(周易)』 또는 『역경(易經)』은 내게 너무 어렵고 멀리 있었다. 공자나 퇴계 같은 분도 평생을 두고 힘겹게 연구한 분야이니 나 같은 범부(凡夫)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초지식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주역』을 접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우주 변화의 원리나 자연현상의 법칙, 그리고 인생과 세상만사의 가르침이 그 속에 있다는 호기심이 컸기 때문이다. 막연히 신비한 것일 뿐 아니라 그 속에 도가 있고 과학적 원리(예컨대 상대성 원리나 양자역학과 같은)가 포함돼 있다는 것을 듣고 나서 호기심은 점점 커져 갔다.



 그러나 『주역』을 알면 미래가 보인다든지, 없던 지혜도 생길 것 같은 다소 허황된 호기심만으로 가까이하기에 그것은 너무 벅찼고 적당히 공부해서 알게 되는 분야도 아니었다. 더구나 많은 사람이 『주역』이라는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또 다른 계기가 필요했는데 그 두 번째는 남회근 선생이 『주역』에 관한 책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였다. 그 전에 『금강경 강의』라는 선생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해박하고도 통찰력 있는 동양학 지식, 풍부한 인생 경험뿐 아니라 위트 넘치는 해설 등에 흠뻑 빠지게 됐다.



 남회근 선생은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알려진 분이지만, 잠시 그를 소개해본다. 그는 1918년 중국 본토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무예·서예·역학·의약 등을 배웠고, 20대에는 불교 공부에 심취하면서 티베트의 밀교의 정수를 전수받는 한편 수행도 병행했다.



 1949년 대만으로 건너가 강의와 수련, 저술 활동을 펼쳤다. 미국·홍콩 등지에서 유불도(儒佛道)에 관한 가르침을 펴다가 말년에는 중국으로 돌아와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2012년 9월 9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만에서 국사(國師)로 추앙받을 만큼 동양학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갖췄다.



 그의 책을 읽으면 아무리 어려운 부분이라도 밤길의 등불을 본 것처럼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남 선생이 쓴 책을 발견하면서 『주역』에 접근해볼 조그만 용기가 생겼다. 그 책은 다름 아닌 『주역계사강의』였다. 『계사전(繫辭傳)』은 『역경』을 읽기 위한 해석서이자 참고서에 해당하는데 공자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맨 처음 문장은 『주역계사전』 중 일부다.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천할까요? 세상에는 어떤 것도 그것 자체가 절대적으로 귀하거나 천한 것은 없습니다. 귀천은 그것이 놓여있는 자리에 따라 달라지는 법입니다. 정당한 자리에 있으면 바르고 정당하지 못한 자리에 있으면 바르지 못합니다. (…) 자리가 바르지 못하면 가장 귀한 것도 제일 천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 『역경』을 오래 공부해보면 회(뉘우침), 린(인색함)이라는 것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행동이 옳고 곧다면 마음속에 나쁜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설사 우(근심), 회, 린의 처지에 부딪히더라도 마음은 언제나 떳떳하여 평상심으로 대할 뿐입니다. 이렇게 하면 모든 것이 곧 편안해집니다. (…) ‘개(介)’란 꿋꿋하고 당당한 것을 말합니다. 행동거지가 바르고 생각이 건전하다면 어떤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자연스럽게 흉한 것을 길한 것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 가령 점을 쳐 무구(无咎)가 나왔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지 말고 ‘회(悔)’가 있다고 생각하여 모든 것을 조심하고 스스로 반성하기를 거듭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무구가 됩니다.’(남회근의 『주역계사강의』 중에서)



 얼마나 쉽고 명료한 해설인가.



 그런 해설을 읽으면서 주역이 이해가 되고 좀 가까워진 듯하다가도 그다음 단계에 이르면 다시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이 길이 묘연하고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주역』이라는 큰 바다 속에서 나는 여전히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듯이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장님임을 자각하고 또 만져지는 부분이 코끼리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다면 처음부터 코끼리를 만져보지도 않은 것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춘기 시절,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 철학을 ‘왜 살고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지 등을 고민하는 것보다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게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 단순하게 이해했듯 어떤 책 속의 말이나 사상을 접할 때 그 깊은 뜻을 다는 모르더라도 나름 자신의 생에 보탬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책을 읽는 보람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와인에 해박한 지인을 만난 자리에서 어떤 와인이 좋은 와인인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와인의 가치는 가격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이 마시는 사람이 누구인가, 어떤 장소, 어떤 분위기에서 마시느냐에 따라 와인의 격이 정해지는 겁니다. 수천만원짜리 로마네 콩티라 하더라도 불편한 사람과 마신다든가,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곳에서 마신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마시는 1만원짜리보다 못할 테니까요. 결국 좋은 와인이란 좋은 사람들과 좋은 분위기에서 좋은 음식과 함께할 수 있는 와인인 것입니다.”



 와인도 위치나 자리에 따라 격이 달라지는데 사람에 있어서는 더 말해 무엇하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내가 가진 권력이나 재물 등 모든 것은 신불(神佛)이 잠시 내게 맡긴 것이니 나는 이를 잘 사용하였다가 돌려주어야 한다”는 말이나 중국 선불교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마다 참되게 한다)’ 같은 사상도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난해 30여 년 일해 왔던 공직에서 퇴임했다. 그동안 여러 보직에서 일해 왔는데 위 문장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난 이후로 어떤 자리에 발령이 나면 과연 내가 있는 자리가 귀하게 될 것인지 천하게 될 것인지 또 귀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행동과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를 생각하며 삼가는 마음으로 임하게 됐다.



 좀 더 일찍 이 문장을 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근래 비정상의 정상화가 많이 회자되는데 이 역시 모든 분야에서 비정상적으로 자리 잡은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노력이 아닌가 한다.



 요즘 자리가 바르지 못해 또 생각과 행동이 올바르지 못해 귀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주역』 속에는 인생에 대한 교훈과 세상사의 이치, 우주만물과 자연현상의 원리. 이런 것들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지만 그럼에도 『주역』은 아직 내게 너무 깊고 너무 넓고 너무 어렵다.



시에 빠져 살던 문학소년



한때 영문학도를 꿈꿨던 문학소년. 고교 시절엔 시에 푹 빠져 지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출신지나 출신학교, 이력과 소소한 일화 등을 잘 기억한다. 덕분에 붙은 별명이 ‘보학의 달인’. 개개인의 족보, 즉 과거사에 통달했다는 뜻이다. 요즘은 갓 태어난 손녀 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1953년 대구 출생. 경북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사법시험 20회에 합격해 검사로 임관했다. 서울고검장을 거쳐 청와대 민정수석과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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