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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일제시대 가슴 아린 가족사가 흑백 사진첩처럼

중앙일보 2014.03.29 00:29 종합 23면 지면보기
셋째 딸 이야기

강인숙 지음

곰, 320쪽

1만2000원




소학교 아이들은 해가 넘어가도록 방풍림에 있었다. 어른들이 톱으로 자르면 송진이 쏟아지는 소나무 둥치에 달려들어 질긴 뿌리를 캐냈다. 어설프게 도끼를 휘두르느라 나무 뿌리 대신 제 발가락을 세 개나 잘라버린 아이도 있었다. 일본은 옷감을 절약한다는 구실로 여자들의 저고리 고름을 길에서 잘라버렸다. 지난해 여든을 맞은 문학평론가 강인숙 선생이 체험하고 목도한 식민치하의 풍경이다. 이 책은 지은이가 빼앗긴 나라에서 딸 많은 집 셋째 딸로 태어나 한국전쟁이 나기까지의 가족사를 기록한 수필집이다.



 식민지와 한국전쟁은 모든 이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만큼 거대한 파도였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낸 한 가족의 역사에서 시대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채 스물도 되기 전 3·1 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하느라 대학에도 못 갔다. 고향에 돌아오는 것도 금지됐다. 오빠는 학도병 징집을 피하다 독한 징용에 끌려가 반병신이 되어 겨우 돌아왔다. 큰언니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 얼굴도 못 본 남자와 약혼한다. 정혼하고 불과 두 시간 뒤에 천황이 항복을 선언했다. 해방된 날, 그 축일의 밤에 아버지는 꽉 잠긴 목소리로 읊조린다.



 “무르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글쎄 두 시간만 참으면 되는 걸….”



 아버지는 딸을 더 사랑한 페미니스트였으나 첩과 따로 살림을 냈다. 작은 언니는 아버지 대신 가족을 부양했다. 귀하게 얻은 남동생은 떠돌아 다니느라 대강 지은 추운 집에서 폐렴으로 병사했다. 죽은 아들 때문에 어머니의 혼이 나간 동안, 막내 여동생은 녹내장을 얻어 평생을 고생했다. 어머니는 대지의 여신처럼 그런 가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러안으며 건사했다.



 일가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먹먹한 감동이 밀려온다.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이에겐 이런 증언이야말로 귀한 역사다. 그간 기고한 글을 모은 터라 중복되는 부분이 나오기도 하지만, 같은 장면을 달리 찍은 사진이 여럿 있는 가족 앨범을 넘긴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여성의 시각으로, 또 단단한 문장으로 증언해 줄 어른이 귀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더 빛을 발한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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